형이상학과 종교
# 1. 신은 그 개념에서 신의 실재적 존재가 논리적으로 추리된다. 즉, <인간은 신/神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 신이라는 개념은 전지전능한 존재를 의미한다. => 그런 존재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존재는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데카르트/1596~1650).
# 2. 신의 존재는 직관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과학적/논리적으로는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결단의 문제다. 그리고 신이 있다고 믿는 편이 손해가 없다(파스칼/1623~62).
# 3. 신은 과학적/객관적 진리로는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오로지 투신(投身)적/무조건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키르케고르/1813~55).
도깨비라는 개념이 있다고(만들어졌다고) 해서 도깨비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은 그렇지 않다. 도깨비는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신이 없으면 인간이 기댈 곳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이런 논리의 허구성은 칸트(1724~1804)에 의해 진즉에 밝혀지긴 했다. 이후 20세기 대두된 현상학과 분석철학에 의해 더욱 명쾌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칸트는 유럽의 대륙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통합해 내놓은 새로운 인식론에서,‘존재의 개념은 속성적 개념이 아니다/존재의 필수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다’라는 명쾌한 논리를 내놓았다.
1) 우리가 존재라고 알고 있는 개념은 존재자체가 아니고, 2) 인간이 존재를 의미화/관념화한 하나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3)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갖지 못하는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위와 같은 논리를 믿는(믿고 싶은) 사람은 아직도 많다. 왜일까?
무릇 종교란, 1) 초월적 타계(他界/형이상학적 존재)와 현세를 관리하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며, 2) 의식과 제의를 통해 그 신의 힘을 빌려 인간의 궁극적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이론적/실천적 신념체계’이다. 따라서 종교의 일정 부분은 앎이고 지식이다. 따라서 종교도 일정 부분은 형이상학이다.
과학적 지식이나 상식을 1차적인 감각적 지식이라고 한다면, 종교나 형이상학적 지식은 2차적인 이론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형이상학적 지식은 감각적인 지식을 비현상적/초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명의 원칙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종교적 지식과 형이상학적 지식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 형이상학은 우주/자연/존재의 근원적 실체나 원리를 비인격적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반해, 종교는 인격적 신으로 설명한다. 즉,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원적 실체나 원리를, 선(플라톤), 브라만(브라만), 절대정신/Geist(헤겔), 권력에의 의지(니체), 태극(유교) 등으로 설명한 반면, 종교서는 인격적 신으로 설명한다.
2) 형이상학의 진리는 이성에 바탕 한 것인 반면, 종교적 진리는 이성을 넘어선 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에 바탕 한다. 즉, 형이상학적 진리는 불변적/가정적이어서 이성적 고찰을 통해 언제라도 수정이 가능한 반면, 종교적 진리는 절대적/불변적이어서 수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독교서는 신을 무조건 믿어야 하며, 만일 그것을 회의하면 종교는 없어지고 만다.
3)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의 궁극적 실체나 원리가 내재적인 데서 나오는 반면, 종교에서는 외재적인 신에서 나온다. 즉, 형이상학의 모든 원리는 우주의 변화와 현상이라는 내재적인 데서 나온 반면, 종교의 모든 원리는 우주 밖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나온다.
형이상학은 가시적/감각적/경험적인 1차적 지식을 총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 설명은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형이상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신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연약함)’라는 파스칼의 빈정(?) 거림이 나온 건 아닐는지……
◘ Text image/최초의 형이상학자 파르메니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