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블랙 코미디-1

乘風破浪 2019. 12. 8. 11:23

 

# 1. 한 상인이 매우 슬픈 표정으로 시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묻지 말게. 나는 너무 슬퍼서 지금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네.”

궁금해진 친구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이렇게 슬퍼하는 걸 전에는 본 적이 없는데…… 그 동안 어려운 일을 모두 참아 오지 않았나? 혹시 돈 때문인가? 이렇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다니. 어디 말을 해 보게.”

“사실은 두 주일 전에 숙부님이 돌아가셨다네. 10만 달러의 유산을 남겨주고 말일세.”

“이보게 자네 머리가 돈 게 아닌가? 숙부님으로부터 10만 달러나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기뻐해야지 슬퍼할 이유가 뭔가?”

“그렇다네. 그런데 지난주에는 또 한 분의 숙부가 돌아가셨네. 그가 이번에는 20만 달러를 남겨주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자네 머리가 완전히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춤을 추면서 기뻐해야지 슬퍼하다니 말이 되는가? 자네야 말로 최고의 행운아일세.”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이제 내게는 더 이상 유산을 물려줄 숙부 가 안 계신다네. 나는 그것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네.”

 

살아가는데 쓰이던 갖가지 물건이 상품으로 바뀌면서, 상품은 화폐로, 화폐는 자본으로, 자본은 권력으로 바뀌었다, 이 자본권력은 생산과 소비를 장악하고 나아가 시장·국가·세계질서까지 장악하여 사람들을 자본문맥(資本文脈)에 가두어 버렸다. 이른바 ‘삶의 주된 옳음을 자본이라고 여기게끔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블랙 코미디**라도 만들어 일말의 위안(?)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 2. 오십여 년 동안이나 미개인 마을에서 육영사업을 해 온 사람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현인을 찾아왔다. 그는 그 마을에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세운 사람이었다. 현인이 물었다.

“당신은 오십 년 동안이나 그들을 교육했다. 그렇다면 교육받기 전보다 나아진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면에 비춰 볼 때 무엇이 낳아졌다고 생각하는가? 이 점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육영 사업가는 당황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솟았다.

“선생님, 저는 한 번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교육받기 전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육을 받자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십 년 전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 사람들은 순박했습니다. 무식하긴 했지만 순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도둑도 없었습니다. 설령 누가 남의 집 물건을 훔쳤다고 해도 그 즉시 마을 어른들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는 집집이 자물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삶이란 일을 통해 식/의/주를 해결하고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유사 이래 교육의 본령은 이의 효율적 수행 능력 배양이었다. 그런데 자본이 주된 옳음이 되고부터는 교육의 본령도 욕망 성취(성공)나 능력 확장에 치중하게 되었다. 아무리 능력을 확장해도 욕망의 확장은 능가할 수 없을 터인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일찍이(2,500여 년 전)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린다 해도 인간의 욕망은 다 채울 수는 없다(법구경)’는 경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결국은 욕망 기제에 대한 이해와 절제가 없는 한 이런 블랙 코미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Text image/마르크스 엥겔스 동상

* 資本主義: 生産手段을 가진 資本家 階級이 勞動者 階級으로부터 勞動力을 사서 生産活動을 함으로써 利益을 追求해 나가는 經濟構造.

** black comedy: 人間의 本性이나 社會에 對한 殘酷하거나 痛烈한 諷刺와 反語를 內容으로 하는 喜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