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3제
1997년, 한 인연으로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더불어 한길>이라는 휘호를 받은 게 있다.
서재에 걸린 그것을 볼 때면, 선생의 저서 몇 권이 꽂힌 서가에 눈길이 가면서 그의 뜻을 되새겨 보게 된다.
휘호 밑에 잔글씨로 쓰여 있는,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것을 볼 때면, ‘스승과 제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교사/학생’보다 ‘스승/제자’를 더 높이 쳐 주는 풍조가 생겼다. 스승과 제자가 어떤 것이기에 그러는가 싶어, 이 책 저책을 뒤져보곤 한다. 숱한 사례들이 나온다. 그런데 유독 눈을 끄는 것이 불교서적에 실린 사례들이다.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위해 여러 방편을 만들어 가르친 사례들이 재미와 함께 깊은 감동적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르침은 요즘 학교의 교사/학생 간의 지식 전수와는 전혀 다른 진리 전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중 스승과 제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게 붓다와 가섭이 아닐까 싶다. 45년간 전국을 떠돌며 설법을 하던 부처가 어느 날 법회서, 설법 대신 연꽃 한 송이를 보여 주자, 제자 가섭이 그 뜻을 간파하고 미소로 답한 것이다. 붓다가 염화시중(拈華示衆)으로 가르친 진리를 가섭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아차렸다는 이 장면은 인류역사상 가장 멋진 방편이요 퍼포먼스*로 보이기도 한다.
* performance: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내용을 신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술 행위
이런 퍼포먼스(방편)를 통한 가르침의 전통은 천여 년에 걸쳐 28대 보리달마(菩提達磨)로 이어졌고, 이는 또 중국으로 전해졌다. 달마의 가르침은 중국의 도가사상과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선불교로 발전하기도 했다. 달마의 첫 제자인 혜가(慧可) 이야기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게 하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이렇게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불교의 법통은, 2조 혜가=>3조 승찬=>4조 도신=>5조 홍인=>6조 혜능으로 이어졌다.
# 1. 1,400여 년 전 인도서 중국에 온 달마(達磨)는 곤산 소림사 암자서 9년째 면벽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와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년은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 마당에 선 채 하룻밤을 지냈다. 밤새 눈이 내려 청년의 허리까지 쌓였다. 아침이 되어 겨우 거동한 달마는 마당에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청년을 보고 호령했다.
“무엇하는 놈이냐?”
“저는 스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절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자 달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법인데 그따위 정성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자 청년은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왼손 팔목을 내리쳤다. 그리고 눈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떨어진 손을 거두어 달마에게 바쳤다. 그제야 달마는 말했다.
“됐다. 그대를 받아들겠노라.”
퍼포먼스 식 가르침의 전통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무애(無碍)/파격(破格)의 수행으로 유명했던 스승 경허(1849∼1912)와 제자 만공(1871∼1946)의 다음 퍼포먼스는 웃음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는 화엄경의 진수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 2. 어느 더운 여름 날, 경허와 만공이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만공, 다리 아픈가?”
“도대체 더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걸은 제가 벌써 한 달입니다.”
“음, 그렇다면 내 그 다리를 안 아프게 해 주지.”
경허와 만공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삼복더위 속에서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높은 고갯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만공은 눈앞이 아찔했다. 당장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경허는 길옆 목화밭에서 김을 매는 젊은 부부를 향해 어정어정 걸어갔다. 그리고 불쑥 젊은 아낙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는 도망치며 소리쳤다.
“동생 빨리 오게.”
성난 남편이 호미를 들고 경허를 향해 달려들다가 그가 재빨리 도망치자 그를 따르던 만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공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호미든 사내가 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더니 어느새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헐떡이는 만공을 보고 경허가 말했다.
“만공, 지금도 다리 아픈가?”
“다리가 뭡니까? 이 목이 붙어 있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름 모를 산사에서 있었다는 다음의 퍼포먼스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시린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여 주기도 한다.
# 3. 산사에서 한 늙은 스승이 임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제자들이 스승의 발아래 꿇어앉아 장례절차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직 한 제자만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스승이 어떤 사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제자는 시장으로 사탕을 구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이 좋아했든 사탕은 옛날에 유행했든 것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스승은 죽지 않고 있었다. 스승은 어쩌면 죽음을 뒤로 미루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 올 때마다 방을 둘러보곤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그 제자는 마침내 사탕을 구해 손에 쥐고 스승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제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듯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발을 닦으며 스승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래, 드디어 네가 왔구나. 사탕은 가져왔느냐?”
제자는 손에 쥐고 있던 사탕을 스승에게 내밀었다.
“스승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 사탕을 아주 좋아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스승님께 사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손안에 있던 사탕은 산길을 올라오는 도중에 다 녹아버리고 없었다. 제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 Text image/김명국(1600~?)의 達磨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