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인격 형성 과정
2,500여 년 전, 공자(BC551~479)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신감을 얻어 홀로 선 후, 마흔 살에 미혹에서 벗어났고,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 살에 남의 말을 순순 듣게 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 不踰矩. / 論語 爲政篇)
지금 우리들의 보편적 삶의 과정에 비춰봐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술회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비춰 보면 고개가 갸웃해 지는 면이 없지도 않다.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56세에 모국(노나라)을 떠나, 14년 간이나 이웃나라를 방랑하면서 정치 야욕/포부(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정치를 하려던)를 채우려 했던 점이 그렇고,
정나라에 갔을 때. 사람들이 성곽 위서 생각에 잠긴 그를 보고 제자 자공에게, "당신 스승의 궁색한 옷차림이 마치 상갓집 개 같다."고 하자, 자공은 벌컥 화를 냈지만 나중에 공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땐, 태연히 "나는 확실히 상갓집 개와 같다.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라 한 위 술회와 상반된 태도를 보인 점도 그렇고,
또 사후 제자들이 편찬한 《논어》에 그가 완벽한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은 점도 그렇다. 제자들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모습. 낮잠을 잔 제자에게 '더 이상 댈 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는 모습,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무시하고 소리 내 통곡하는 모습, 가끔씩 자기 자랑을 장황히 늘어놓는 모습 등도 그렇다.
어떻든 평균 수명이 25세 정도였을 청동기시대(지역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에 나온 담론이지만, 100세 시대인 오늘에 적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걸 보면 훌륭한 통찰인 것만은 분명하다.
10대에 시작한 공부를 30대에 완성해 한 인간으로 독립을 한 후. ‘불혹不惑=>이순耳順=>지천명知天命=>불유구不踰矩의 경지’로 인격을 업그레이드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이상적 인생역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종 단계인 ‘불유구不踰矩의 경지’란 모든 인간이 바라는 무애/해탈의 경지기도 하다. 흔한 말로 ‘득도/도통의 경지’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하긴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이기적/자기중심적 사고와 행위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1) 40이 되어서도 매사에 미혹되고, 2) 50이 되어서도 우주/자연/존재의 순리나 법칙이 뭔지도 모르고, 3) 60이 되어서도 남의 말을 순순히 듣지 못하고, 4) 70이 되어서도 세상 순리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인격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공자처럼 인격을 형성해 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지난 2500여 년 동안 많은 해법이 나왔음에도 말이다. 늙어서(70살) ‘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드문 것이 그 좋은 증좌다. 그래서 감히 감히 생각해 봤다. 바로 철학을 통한 실천인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마음(욕망)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추구와 불만족’이라는 마음의 속성이다. 마음은 ‘아무리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은 일시적이고, 다시 더 좋은 것과 더 많은 것을 추구한다.’ 물론 인간의 성취욕은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메커니즘을 알고 살 때, 삶의 질은 완연히 달라질 것이다.
둘째, 인식/앎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앎/인식이란 ‘객관적 대상이 의식에 포착되어 언어로 의미화/관념화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1) 금과옥조로 믿고 따랐던, 2) 정언명령처럼 감히 거역할 엄두도 못냈던, 3) 객관적 존재라고 믿었던, 4) 신의 계시, 진/위, 선/악, 미/추 같은 것들이, 5)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든 언어적 의미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6) 삶의 모든 이념/체제의 속박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원천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때그때의 ‘인생에 있어서의 의미’는 만들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이를 알려면 1) 자신이 인간/인생을 넘어선 초월적 입장에 있거나, 2) 인간을 지구상에 내던진 우주 창조/섭리/의도자(?) 입장이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의 통찰처럼, 인간/인생은 1) 시작도 끝도 없고, 원인도 이유도 없고, 결과도 결말도 없이 2) 역동적 변화와 영원회귀만을 거듭되는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때, 3) 지천명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불유구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