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년 단 상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잠언시집이 있다. 생애 주기별 과업을 통해 얻은 노년의 지식과 지혜를 그때(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하고,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하고, 사랑에 더 열중하고, 더 많은 용기로, 더 많은 사람의 더 좋은 면을 보고, 더 춤추고, 더 신뢰하고,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을 것(발췌)……” 이라고 읊은 킴벌리 커버거의 시 제목을 쓴 책이다.
과연 노년에 이르러 알고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젊은 시절 알았더라면, 그 젊음이 더 좋은 젊음이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젊음의 특성이란, 1) 정체성 정립을 위한 번민/혼란/방황, 2)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희망/절망, 3) 무모함에 가까운 저돌성 등이기 때문이다. 이런 젊음을 노년의 지식과 지혜로 보냈다면 그건 이미 젊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고 잘 된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만은 예외가 아닐까 싶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 상인방(上引枋)에 새겨져 인류에게 명령하고 겁박(?)해 온,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그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것 때문에 허비한 열정/노력/시간도 적었을 것이고, 자신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덜 했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 아는 나는 주체고 그것은 객체다.
‘육체를 안다’고 할 때, 아는 나는 주체고 육체는 객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안다’고 할 때는 다르다. 아는 주체인 나와 객체(대상)인 내가 같기 때문이다. 논리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에 대한 명쾌한 논리를 내놓은 사람이 사르트르다. 그는 1943년,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분석(현상학적 방법) 해 새로운 존재론(存在와 無)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이원론인 물질과 정신 대신 내놓은 ⌜즉자와 대자⌟가 그것이다. 즉 1) 의식 대상으로의 존재인 즉자와. 2) 그것을 의식하는 존재인 대자다. 무엇인가가 존재(대상/즉자)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의식(경험/대자)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한마디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인 즉자와 인간인 대자로 나눈 것이다.
즉자란, 산/들/나무/책상/의자처럼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의지나 의식이 없는 존재다. 또 사자/호랑이/소/말처럼 본능적인 것만 좇을 뿐 무엇이 필요하다거나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존재다. 따라서 즉자는 의식/욕망이 없는 존재기 때문에 그 자체로 충만하고 결핍되지 않는 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대자란, 의식적 존재인 인간으로, 1) 의식과 함께 구체적 육체/성별/시대/장소/가정/환경 등의 조건을 갖춘 존재고, 2) 주체성을 확인해 주는 자유의지도 가진 존재이며, 3) 공간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무(無)적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결핍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은 책임을 수반하고, 책임은 불안을 동반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1) 자유로부터 도피도 시도하고, 2) 자신이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고 자기를 기만하기도 하는 가련한(?) 존재기도 하다.
이런 대자의 특성 상, 인간은 자신을 알려는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대자인 자신이 즉자가 되어야 하는데, 즉자가 되는 순간, 대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흔히 ‘나는 내 분수(자기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를 안다’거나, ‘나는 내 주제(변변치 못한 환경이나 처지)를 안다’는 것을 두고, 자기 자신을 안 거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과거 언행을 되돌아보고 분석한 결과일 뿐, 결코 내가 내 자신을 안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였던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니는데, 그러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지 않은가. “아니.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을 아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결핍된 존재인 대자는 충만한 존재인 즉자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위한노력의 과정에서 삶의 희열과 승리감을 맛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1) 추락을 알면서도 이카로스가 태양을 향해 솟구쳐 오를 때 희열을 맛보고, 2) 도로임을 알면서도 시시포스가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반복해서 들어 올리는 데서 보람을 맛보듯이 말이다.
불교서는 불가능한 ‘자기 알기’라는 화두를 끝까지 밀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새로운 차원의 자기를 발견(견성성불)하게 될 것이라 하고,
실존철학서는 자기 알기가 비록 불하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1) 매 순간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2)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살라고 하는 한편, 3) 자신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 결핍된 대자도가 충만한 즉자가 되는 체험(신적 체험/지복의 체험/쾌감**)을 간간히 하게 되는 존재라고도 하는데,
글~ 쎄~ 다……
◘ Text image/사르트르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류시화 엮음/열림원/1998.
**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의 쾌감을 대자이자 즉자가 되는 상태인 스키타기에 비유했다. 위험 속을 쾌속으로 질주할 때, 간간히 자기(대자)를 잊게(즉자) 되는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의 존재인 대자는 충만한 존재인 즉자가 되기를 염원하는데, 그것이 스키를 탈 때 잠깐씩 자아를 잊는 상태와도 비슷하다고 했다. (<存在와 無>/장 폴 사르트르/정소성 역/동서문화사/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