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神 10 / 고구⋅통찰⋅관조

乘風破浪 2019. 2. 19. 15:26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 개념은 지시하는 존재를 입증하게 된다 / 신이라는 개념은 전지, 전선, 전능으로 가장 완전한 것이다 / 그 완전성에는 존재라는 개념도 끼어 있다 / 따라서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 증명된다.>

유명한(?) 데카르트(1596~1650)의 ‘존재론적 이론'이다. 그러나 빈틈없는 과학적 언어분석으로 전통철학의 형이상학을 일거에 무너뜨린(?) 분석철학에 비춰보면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syllogism/演繹的 推理)을 차용한, 안셀무스(1033~1109)의 <하느님은 안전하다(대전제) / 완전성은 존재성을 포함 한다(소전제) /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한다(결론).>는 황당한 논법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였던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모순과 문제점 그리고 물샐 틈 없는 경험 분석을 통해 근본적 인식론을 정립한 칸트(1724~1804)가, ‘존재라는 개념은 속성의 개념이 아니다!’라 일침(?) 을 가하지 않았던가?


신을 믿는 것과 존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믿음이란 ‘믿는 마음/그렇다고 여기는 바로, 논리가 근거 없이 비약하는 현상’이며, 실재란 ‘실제로 존재함/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니 말이다. 따라서 신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래 일화들은 삶을 고구考究, 통찰洞察, 관조觀照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지는 않을까……


# 1. 神의 존재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전국을 떠돌아다닌다는 수도승에게 한 청년이 물었다.

"선생님은 신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그것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설명은 불가능하다. 나의 행동을 보라. 그러면 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승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걸망에서 과자와 장난감을 꺼내 나누어 준 다음, 함께 먹고 노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단지 신 나는 춤과 놀이와 웃음만 있을 뿐 신의 모습 따위는 없었다. 청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위대한 수도승이라고 들어 왔는데 지금 그의 행동은 한낱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년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 왜 한마디 말씀도 없으십니까?"

"그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행동을 통해서만 끌어낼 수 있다. 지금 신은 과자를 먹고 있다. 은 여기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리고 춤추며 웃고 있다. 다만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 2. 한 사무라이가 배를 타고 신혼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그들의 배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센 폭풍우를 만났다. 신부는 두려움에 떨며 신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랑인 사무라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신부가 말했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가만히 돌부처처럼 앉아만 있는 거예요?”

신부가 말을 마치자마자 신랑은 번개처럼 칼을 빼 들고 신부의 목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신부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신랑을 쳐다보았다.

“왜 웃고만 있지? 칼이 무섭지도 않소? 지금 칼이 당신 목을 겨누고 있지 않소. 조금만 움직이면 당신 목이 달아난단 말이오.”

“그렇지만 칼이 당신 손에 있잖아요.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그러자 신랑은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그렇소. 칼보다 폭풍우는 더 위험하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의 손안에 있소. 그러므로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 3. 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는 현인에게 청년이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저에게도 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현인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그대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상대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지금껏 독신으로 지내왔습니다. 저는 병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여자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도 잘 생각해 보게. 차근차근 옛일을 더듬다 보면 그대의 가슴 어딘가에 미미한 것일지라도 사랑의 자국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 않은가?"

"저는 선생님에게 사랑을 배우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오로지 신에게 이르는 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알고 찾아 왔습니다. 결코 세속적인 이야기나 듣자고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윽고 현인은 청년을 연민의 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네. 그대에게 사랑의 경험이 없다면 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은 불가능하네. 진정으로 그대가 신에게 이르고자 한다면 우선 사랑부터 해야 하네. 왜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 때,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고 그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난 기도를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무엇인가 진실로 느끼지 못한다면 에게 도달하는 일은 영영 불가능하다네. 그러니 다시 한 번 부탁이네. 가서 어떤 존재라도 좋으니 먼저 사랑을 해보게."


# 4. 강가의 오두막집에서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로 살고 있는 현인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청년의 눈을 그윽이 바라보던 현인이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잡고 깊은 물속으로 끌고 가 처박아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청년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끌어내는 것이었다. 청년이 거세게 항의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그러자 현인이 말했다.

"네가 물속에서 공기를 원했던 것처럼 절실하게 찾지 않는 한, 은 결코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 5. 한 젊은이가 율법학자를 찾아와 물었다.

“옛날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이 땅 위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 이름을 불러주어 친밀하게 지내기도 했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신이 이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 땅위를 걷지 않는 건가요? 왜 신은 어둠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 손을 잡아주지 않는 건가요?” “젊은이, 은 아직도 도처에 있다네. 다만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 만큼 몸을 낮게 구부리지를 않는다네.”


# 6. 전자(電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자기가 원자라는 방대한 집합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원자는 자기가 분자라는 커다란 집합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분자는 자기가 예컨대 치아라는 훨씬 거대한 집합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또 치아는 자기가 인간의 입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런데 감히 한낱 전자일 뿐인 자기가 인체의 극히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따라서 누가 신을 안다고 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나는 분자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다’ 또 누가 신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높은 차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만약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 전체가 그들의 상상력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뭐라고 말할까?


만약 전자가 원자, 분자, 치아, 인간의 차원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또 인간이 행성, 태양계,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나아가 우주 역시 현재로서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훨씬 더 큰 어떤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전자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 있고, 작은 것 속에 더 작은 것이 들어있는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처럼, 우리는 우리를 초월하는 한 세트의 러시아 인형 속에 들어 있다. 이러니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떻게 배겨날 것인가? 자기 세계보다 높은 차원에 무한히 복잡성을 지닌 존재가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인간은 아찔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라는 개념은 이런 현기증에 맞서 만들어 놓은 장치가 아닐는지? (상상력 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열린 책들/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