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乘風破浪 2019. 2. 24. 11:51

 

527년, 인도서 중국으로 온 달마는 한쪽 신발은 발에 신었지만, 나머지 한쪽 신발은 머리에 이고 있었다. 그를 마중 나온 황제는 매우 당황했다. 위대하고 거룩한 성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 행색은 마치 미친 거지같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당장 그 행색을 거두십시오. 당신은 성자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오직 성자가 아닌 사람만이 성자처럼 행동합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에 한쪽 신발을 얹고 있는 당신 모습은 마치 미친 광대처럼 익살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익살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만 익살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당신의 특별한 의상이 더 익살스럽습니다. 당신에게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 한 쪽 신발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겁니다. 나를 보십시오. 결코, 겉모습만 보지 마십시오. 내가 머리에 신발을 얹은 데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불경스럽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신발 한 짝이라도 그대의 머리만큼 성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알 수 없는 감명을 받은 황제가 다시 물었다.

“한 가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나는 너무 참을성이 없고 너무 자주 혼란에 빠집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상태입니다.”

“내일 새벽 4시에 나를 찾아오십시오. 그런데 그때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내가 편안하게 해 주겠습니다.”

황제는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은 지금 무얼 말하는 것일까? 마음을 가지고 오라니?’ 달마가 계속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혼자 오시 마시고 반드시 마음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무엇을 진정시키겠습니까? 4시입니다. 시종 따위는 데리고 오지 마시고 혼자 와야 합니다.”

황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는 조금 미친 것 같다. 내가 있으면 내 마음도 함께 있는 것인데 마음을 데리고 오라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래서 황제는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누가 아는가? 정신 나간 그가 혼자 있는 나를 해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달마에겐 황제의 마음으로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서는 이 지상에선 볼 수 없는 불꽃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숨결에는 저 너머 아득한 곳에서 온 침묵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에게로 갔다. 달마는 몽둥이 하나를 손에 들고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좋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왔을 때 내 마음도 함께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내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있는 곳을 지적해 주면 이 몽둥이로 그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황제는 눈을 감고 마음을 찾아보려 애썼다. 황제는 애쓰고 애썼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날이 밝아 햇살이 얼굴에 비칠 때는 완전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왕이 눈을 뜨자 달마가 물었다.

“마음을 찾았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내가 그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와도 같았습니다. 나는 지금껏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기 있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영화 제목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차용해 봤지만, 뜻이 금방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달마가 동쪽으로(중국으로) 온 까닭은>이라고 하면 알 수 있는 텐데, 아마 영화의 극적 효과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중국에 온 달마가 처음으로 편 위 방편은 참으로 괴기스럽고 난해하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경전 안에 있지 않고, 글자로도 성립되지 않으니, 마음을 직접 가리켜서, 본성을 바라 봐야만 깨달음(성불)에 이를 수 있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 준 선불교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1) 붓다가 영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던 중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을,

2) 마하가섭이 미소로 답을 함으로써 비롯된 ‘직관에 의한 깨달음’의 방식이다,

3) 이것이 천 여 년을 거쳐 28대 달마로 전수되고,

4) 이를 달마가 중국으로 가져와서,

5) 도가사상과 결합해 독특한 형태의 불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 핵심도 ‘직관적 명상을 통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어떻게든 제자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개개인의 근기(根機)와 상황에 맞는 방편을 개발해 사용했다. 물론 이 방편들은 세월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거쳐 위와 같은 기괴한(?) 버전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그래서 이런 방편을 접할 때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내면에 숨겨진 핵심을 봐야 한다. 즉 위 방편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그릇된 분별이나 집착을 떠나 마음이 빈 상태)에 이르면 불안도 없어진다’는 심리기제를 보는 식이다. 또 서구 심리학의 심리치료 기제와 관련시켜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1) 상담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적 치료’나, 2) 심리치료에 명상과 불교 심리학을 원용한 크리스토퍼 K. 거머와 로널드 D. 시걸의 ‘심리치료에서 지혜와 자비의 역할’ 등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1)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인 종교라기보다는, 2) ‘초자연적 절대자 아닌 현상의 구체적 관찰과 논리에 근거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화체계’기 때문이다.

 

또 가르침의 핵심도 1) 모든 고통(苦)은 2) 집착(集)에서 오기 때문에 3) 이 집착을 소멸(滅)시키면 되는데 4) 그 방법이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이다. 하긴 2,500여 년의 포교/전교 과정에서, 초자연적 대상(불상?)에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이 가미되면서, 지금은 거의 일반적인 종교처럼 바뀌긴 했지만……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배용균이 제작, 연출,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 등 영화의 전 과정을 담당해 완성한 영화다.

기획 8년, 제작 4년이라는 오랜 제작 기간이 소요된 이 작품은 198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표본이라 일컬어진다.

또한 한국에서 제작된 첫 번째 독립영화로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모두 실천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제42회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해 감독상, 촬영상, 청년비평가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