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시 보는 일왕의 항복문

乘風破浪 2019. 4. 3. 19:51

 

3·1 만세운동 100주년 즈음하여, 각계각층 사람들이 독립선언문 낭송하는 모습(방송)을 보면서 옛 추억 하나를 떠올려 봤다. 고교시절, 국어 선생님 강압에 못 이겨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로 시작되는 선언문을 외우느라 진땀 뺏던 일이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죄과를 진심으로 뉘우친 적이 없다. 오히려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 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적반하장의 태도는 패전국 독일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문제 등에서 패전전범국으로서 사죄모드 없이 파렴치 일변도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5. 8. 15. 발표한 일왕의 항복문(降伏文)을 다시 떠올려 봤다.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중국인 3,500여만 명, 다른 아시아인 1,000여만 명 도합 4,500여만 명이 희생되었다. 반면 일본인은 고작 210(원폭피해자 30만 포함)만이 희생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원폭희생자를 빌미삼아 지금껏 피해자 행세를 해 왔다. 그러면서 교묘한 책임 회피성 항복문이 가이드라인이라도 되는 양, 오늘도 일본은 피해자에게 오만한 태도와 언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항복문을 읽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용과 문맥을 잘 톱아 보면, 우리가 앞으로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떤 것인지 확연히 드러나기도 한다. 항복문에 항복이라는 의미나 단어가 없을 뿐 아니라, 사죄나 사과의 문맥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책임회피성 ‘……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진심 어린 바람에서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뿐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짐은 제국과 합심하여 시종 동아시아의 해방에 힘써온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 발언만 나오니 말이다.

 

오늘날 세계의 대세와 우리 제국이 처한 조건을 깊이 숙고한 결과 짐은 비상수단에 의지해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노라.

짐은 우리 정부에 공동선언 조항을 수락하기로 했다는 뜻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정부에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우리 백성의 안전과 안녕뿐 아니라 만국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 황실이 대대로 내려오는 엄숙한 의무인바 짐은 그 의무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노라.

실로 짐은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진심 어린 바람에서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뿐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은 근 4년을 끌어왔다. 그동안 짐의 육군과 해군은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국가의 종복은 근면을 아끼지 않았으며, 짐의 1억 백성도 섬김에 소홀함이 없었다. 다들 최선을 다해 왔으나 세계의 대세 또한 일본의 이익과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더욱이 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탄을 새로이 사용해 무고한 생명을 무시로 빼앗기 시작했으니 그 피해가 실로 어디까지 갈지 헤아릴 수가 없구나.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일본 한 나라의 파괴와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절멸로 이어질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짐의 1억 백성을 구할 것이며, 또 무슨 낯으로 황실 조상님들의 신위를 뵈옵겠는가? 이것이 짐이 정부에 열강의 공동선언 조항에 응하라고 지시한 연유다.

짐은 제국과 합심하여 시종 동아시아의 해방에 힘써온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장에서 다쳤거나 제 본분을 다하다 죽은 장교와 사병뿐만 아니라 그 유족을 생각하면 짐의 가슴은 밤이나 낮이나 고통을 가눌 길이 없다.

짐이 가장 염려하는 바는 부상자와 전쟁 피해자, 집과 호구지책을 잃은 사람들의 후생복지다. 금후 제국에 닥칠 고난과 시련은 분명히 녹록지 않을 것이다.

짐은 그대들, 짐의 백성들 속내는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의 지시를 받아들여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라 해도 인고하고 또 인고해 만세에 태평성대를 위해 길을 닦기로 다짐하였노라. 지금까지도 제국의 근간을 구하고 유지해 온바 그대들의 한결같은 충정을 믿기에 짐은 항시 그대들과 함께 있다.

행여 감정이 격발해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형제끼리 의견이 달라 갑론을박하며 소요를 조성해 정도에서 벗어나 헤매다 끝내 세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 유의하라.

각자 책임 막중하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명심하고 신령스러운 땅의 불멸을 항시 믿으며 세세손손 한 가족으로 지내라. 장래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 정직하고 고결한 품성을 도야하며 굳은 의지로 밀고 나가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고 진보하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지어다.(정글만리 3권/조정래/2013/211∼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