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0년 묵힌 숙제 - 3

乘風破浪 2019. 7. 1. 16:10

존재란 공간 속 사물과 시간 속 사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말 그대로 존재는 실제로 현실에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식에 포착되어 언어로 표상되기 전까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식하지 못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19세기까지의 전통철학에서는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존재들도, 형이상학적으로 개념화해 놓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인간은 생존 전략상 존재를 개개로 나누어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재 하나하나를 구별해서 인식한 다음, 이를 범주화하여 언어로 표상한 앎(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개개의 사물들은 '벌/나비/얼음/물/책상’등으로 명명하거나, 수많은 현상들을 ‘하늘은 푸르다/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등으로 의미화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앎(올바른 인식/지식/진리)이란, ‘인식 대상인 개개의 존재가 의식에 의해 무엇 무엇이라고 언어로 재구성/재해석/의미화/관념화/개념화 된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존재와 언어가 별개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개념이 존재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라는 언어가 ‘나무’의 실체는 아니듯이 말이다. ‘나무’라는 언어는 ‘나무(?)’라는 대상이 인간 의식에 의해 언어로 의미화 된 것일 뿐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전통철학에서는 <하늘은 푸르다>는 명제가 곧 실재하는 <하늘>이고 <색깔>이라고 생각해 왔다. 개념을 사물로 오인하고 혼동한 것이다. 한 예로 '선/악’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선/악’이란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고,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 개념일 뿐인데도, 그것이 마치 객관적 사실이나 존재인양 여겨 왔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1596~1650)의 <존재론적 이론>이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1)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만들었다).

2) 개념은 지시하는 존재를 입증하게 된다.

3) 신이라는 개념은 전지/전능/전선으로 가장 완전한 것이다.

4) 그 완전성에는 존재라는 개념도 끼어있다.

5) 따라서 신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증명된다.

 

이 이론이 안셀무스(1033~1109)<하나님은 완전하다(대전제)/완전성은 존재성을 포함한다(소전제)/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결론)>는 것이나,

테르툴리아누스(대략 155~160년 경 생)<그것(신)이 엉터리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엉터리 논리의 아류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1)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지각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존재가 지각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 나타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는 논리로,

2)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모든 현상은 지각됨으로써만 그 존재가 인정된다. 물론 그 지각은 인간 의식의 선험적 의식구조라는 그물을 통해서 잡혀진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현상은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의식에 의해 정리되고 해석된 것이다. 존재라는 개념은 속성의 개념이 아니다.”는 논리(인식론)로 위의 것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이런 언어적 오류를 처음으로 지적한 철학자가 니체였다. 즉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에 바탕한 서구 철학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니체 이후 반세기를 지난 후, 현상학자(20세기 초)와 분석철학자(1920년)들에 의해 언어의 의미 규명과 언어적 개념의 명료화가 이루어지긴 했다.

 

대표적인 분석철학자/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의 명료화를 위한 언어 분석/연구서인 <논리철학 논고>를 탈고하고선, "모든 철학은 해결되었다"고 선언할 정도로 흥분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자신했으면 그후 빈으로 돌아가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겠는가. 하긴 그는 막대한 유산을 자선사업에 모두 기증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금욕적 생활을 한 괴짜(?)긴 했지만.

 

지금서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인식론이나 언어철학을 조금만 알았더라도 앞서 제기한 니체의 11가지 명제들이 말하고자 한 뜻을 쉽게 알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니체가 노린 점이 기존체제(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철학/종교/윤리/과학/예술 등)의 부정이 아니라, 그러한 체제에 대한 언어적 오류였다는 점을 쉽게 알았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언어 이전의 존재, 알몸으로써의 존재, 존재하는 것으로써의 존재는 언어와 독립해 존재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의식에 포착되기 전, 언어로 표상되기 전에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1) 존재 유무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2) 무엇이라고 칭할 수도 없어 3) 그야말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언어를 배우기 전의 유아가 존재를 의식할 수 없다가, 이후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식의 속성이 바로 언어 사용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언어와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언어 이전의 존재는 환상이다/인간은 오로지 언어의 틀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우리가 만든 세계만을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 무엇이 있다'고 할 때, 그 무엇은 이미 언어로 의미화 된 것 아니던가.

 

'문법을 집어치우기 않고는 신도 집어치울 수 없다.'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를 들면 <하늘은 푸르다>와 <하늘은 아름답다>는 문법적으로는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가 현상을 지칭한 것이라면, 후자는 현상에 대한 태도나 감정을 지칭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거나 동일 시 함으로써, '푸름'과 '아름다움'을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언어철학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점은, 1) “모든 진리는 거짓이다”가 아니라, 2) 진리란 절대적/고정적/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인류공통의 의미체계인 언어를, 그 언의 규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반응하고 지각하게 되는 사물에 적용했을 경우”임으로, 3) 이 진리를 반성적 사고를 통해 끊임없이 리모델링해 가야만, 4) 바람직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음 회로 이어짐

 

◘ Text image/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