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천국과 지옥
# 1. 한 사무라이(侍)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사를 찾아왔다. 그는 무사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는 겁니까?”
선사는 잠시 생각했다. ‘이 자는 단순하고 불같은 성품을 지닌 무사다. 이런 자에겐 어떤 가르침을 펴는 것일 효과적일까?’하는. 이윽고 선사가 말했다.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나는 천황폐하도 함부로 못하는 무사의 우두머리요.”
“당신이 무사의 우두머리라고? 그런 얼굴을 가지고? 차라리 거지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무라이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불같이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칼끝을 선사에게 겨누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자 선사가 태연히 말했다.
“아, 지금 여기에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구나. 이 칼, 이 분노가 지옥의 문을 열고 있구나.”
이 말에 사무라이는 선사의 예지를 퍼뜩 감지하고 칼을 내려놓으며 선사 앞에 꿇어앉았다. 선사가 다시 말했다.
“여기 천국의 문이 열리는구나.”
# 2. 한 청년이 구르디예프*를 찾아와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지독한 골초였다.
그래서 구르디예프는 이 청년에게 담배를 끊고 오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일 년 후, 담배를 끊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청년이 이제 제자로 받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구르디예프는 서랍에서 값비싼 여송연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축하하네.”
시각장애인에게 빛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비유나 방편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 장애인이 인식한 빛은 실제가 아니다.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 스승들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도 비유나 방편을 동원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십바라밀(十波羅密**)에도 방편이 있다.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쓰는 보살(菩薩)의 절묘한 수단이다. 이러한 방편은 대개 표면의 재미와 내면의 진리라는 이중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약장수가 재담과 묘기로 사람을 끌어 모은 다음 약을 팔듯이, 옛 성현들도 재미로 사람의 흥미를 끈 다음 진리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방편을 대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내면을 향해 끈질기게 파고드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중요한 진리는 표면의 재미를 넘어 내면 깊숙이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일체의 선입관을 버리고 대해야 한다. 방에 햇살을 들이기 위해서 창문의 먼지부터 닦아내듯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때부터 닦아내야 한다.
위 두 가지 방편도 마찬가지다. 물론 선사의 방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근기에 맞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르디예프의 것은 어렵다. 구르디예프는 절대 긍정에 이르기 위해 절대 부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너를 괴롭히느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그런 후에 그 자유로부터도 자유로워져라.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심오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方便: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로 보살(菩薩)이 중생을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쓰는 묘한 수단.
* 아르메니아의 신비주의자/수피즘 지도자
**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혜慧 / 방편方便 / 원願 / 력力 / 지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