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서는 해탈/열반/NIRVANA*의 경지를 ‘내면에 행위자가 없는(몰아) 빈 상태로, 모든 의문이 걷히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없는 상태’라고 한다.
반면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그와 유사한 경지를 ‘대자(의식으로써의 존재인 인간)의 일시적 즉자화(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대상으로서의 비의식적인 존재)’라고 하면서, 스키 탈때의 일시적 자아상실(부재)을 예로 들기도 했다(철학단상-3).
이러한 일시적 자아부재는 내면에서 행위자(자아)가 없어지는(몰아) 경우로 주로 '힘든 과업/Hard Work'을 수행할 때 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1) 대구에서 울트라마라톤 경기를 하던 한 선수가 레이스 중이라는 걸 잊고,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자기 집으로 와 버린 것처럼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갔었다는 사례를 비롯해,
2) 달리기 전문가 조지 쉬언의 ‘달리다 보면 생각도 멈추고 이성도 작용하지 않는 한 순간에, 진실이 확 드러나는 걸 보게 된다(<달리기와 존재하기>/한문화/2003)’는 고백도 있고,
3) 달리기를 통해 작가로서의 정신적 자양분을 얻는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백 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 완주 체험담도 있다. 그는 1996. 6. 23. 사로마 호수 둘레 레이스 중이었다. 55킬로미터 지점부터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육류 다지는 기계 속에 빠진 쇠고기 느낌이었다. ‘나는 기계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라고 되 뇌이면서 달렸다. 체내에서는 모든 기관이 강력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75킬로미터 부근에서 뭔가가 몸에서 ‘슥’하고 빠져나갔다. 마치 돌 벽을 빠져 나간 것처럼 저쪽으로 몸이 통과해 버렸다. 육체의 고통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상하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11시간 42분에 1백 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 후, 과장해서 말하면 나는 '약간 다른 장소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느낌’ 속에 산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2009).
4) 몰입/몰아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있다. 시카고대학 심리학/교육학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지’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몰입이 삶의 보람이고 만족이고 행복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경지는 ‘힘겨운 과제/Hard work와 수준 높은 실력이 결합될 때’잘 일어난다고도 한다.(<몰입의 즐거움>/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이학재 역/해냄/1999).
그러고 보면 힘든 운동선수의 몰아경, 신비가의 무아경, 예술가의 몰아경 모두는 어쩌면 일시적 자아상실이고, 몰아의 경지고, 대자의 즉자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 사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몰아 사례가 있다.
“영혼이 신체를 빠져나온 상태, 즉 의식이 육체를 떠나거나, 세계를 육체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경험(위키백과)”이라는 유체이탈(幽体離脱Out-of-Body Experience)인데, 이를 몸소 체험 했다는 사람이 있다. 인도의 신비가로 불린 라즈니쉬가 21살 대학생 때 이런 체험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나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명상을 하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나무 위에서 땅바닥에 떨어진 내 몸을 보았다. 그런데 환한 빛줄기가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진 내 배꼽에서 나온 은빛 끈이 나무 위의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내 몸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의 바깥에서 내 몸을 보았다. 그날로부터 나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개체로 떨어져 있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깨달았다.
아침이 되어 우유 통을 가지고 지나가던 두 여인이 나의 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광경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잠시 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 순간, 어떤 마력에 이끌린 듯 나는 스스로 내 몸 안으로 돌아가서 눈을 떴다.
이후 나는 여섯 달 동안, 여섯 번 이런 체험을 했다. 그 후, 나는 내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았다. 즉 일흔 살까지 살 운명이었다면, 이제 그 체험으로 인해 예순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하리라는 느낌이었다. 가슴의 털이 하얗게 변했으며, 그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명상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그간의 의문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할 것이 없어졌다.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내 안은 비어있었고, 행위자도 없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모든 욕망도, 신(완전해 지고자 하는 열망)이나 니르바나(열반)에 대한 염원도, ‘깨달음 병’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여기에서-라즈니쉬의 삶>/메산트 죠쉬/류시화 역/제일출판사/1984/88∼92쪽 요약)
이후 라즈니쉬는 20년간, 이 체험을 일절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 그 일이 1953. 3. 21. 일어났었다고 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존의 철학·사상·종교 중에서 위선적인 것, 인간성이나 진리에 어긋나는 것들을 모조리 찾아 혹독하게 비판해 왔다. 그래서 많은 위험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이 사실을 밝히면 살아남지 못할 것도 알았다. 그래서 침묵을 지켰다. 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내 사람들, 내게 속한 사람을 충분히 모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밝히기로 했다. 나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들었을 때 내가 더는 군중과 어리석은 무리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때 그 일을 밝히려 했다. 예수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좀 더 침묵을 지켰더라면, 인류는 그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위 책 93∼95쪽 요약)
유체이탈 체험 사례의 진위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꿈과 환상, 하시시나 LSD 같은 마약, 병든 뇌와 죽어가는 뇌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화학적 변화’일 거라는 정도다. 그러나 80년대 한때, 라즈니쉬 책에 심취해 40여 권을 읽고 행간까지 헤아려 본 바에 의하면, 그의 체험담이 거짓은 아닐 거라는 심증은 가지만, ‘글세?’라는 단어를 지울 수 없다. 반면 사르트르의 대자의 즉자화, 조지 쉬언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몰아 체험담, 칙센트미하이 몰입 논리에는 다분히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우리도 몰입/몰아로 들어 설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 Text image/라즈니쉬
*해탈/解脫: 1) 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남 2)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열반/涅槃: 1)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2) 승려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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