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직후 부시 대통령의 인기는 미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93%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1년도 못 된 ‘92년 초엔 37%로 폭락했다. 또 이라크전쟁의 작전사령관은 아이젠하워나 맥아더 원수에 버금가는 영웅(?)이 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이 역시 6개월도 못 가 사그라졌다. 무기산업 활성화를 통한 불황타개라는 전쟁이 빚어낸 냄비 현상이 아니었던가 싶다.
예로부터 전쟁이나 국가위기론은 국민통합에 최고 특효약(?)이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집권 세력이나 국가위기론의 확대 재생산이나 전쟁획책 등을 통해 반대세력을 잠재워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는 달라졌다.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해 취한 정책이 대결이 아니라 화해/평화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 야당은 긴장과 대결정책을 주장하면서 안보위기론이나 안보 ‘폭망론’확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부가 북한과의 경제교류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수입규제에 맞서려고 하자,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좋은 예다. 물론 야당은 정부를 비판하고 흠집을 내야만 정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보수 세력에겐 색깔론과 냉전적/위기적/적대적 공존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간 ‘남북대결과 위기론 조성’으로 정권을 유지해 왔고 또 밥그릇도 지켜 왔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는 국가의 부가 침략전쟁으로 넓힌 영토에서 나왔지만, 오늘날은 쌍방이 이득을 보는 무역에서 나온다. 따라서 전쟁은 더는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그러면 과연 북한은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다음 논문을 보면 그럴 확률이 아주 낮음을 알 수 있다.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대규모 군사공격, 즉 소단위의 병력이 국소적 공간에서 단기간의 전술적/일회적 전투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선전포고의 유무와 관계없이) 전선과 후방에 걸친 장기간의 총력적 군사작전을 전개할 경우, 전쟁이론의 일반적 준거로서 다음 6가지 요소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부에 대한 확실한 자신이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침전쟁을 구상하거나 준비하거나 계획한다면 아 6가지의 치밀한 검토에서 무두 남한에 우월하다는 확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1) 개전 시점에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세해야 한다.
2) 단기적 속전 방식으로 승리를 기대하려면, 공격군의 병력·무기·화력·기동력 등 종합전력이 수비 측의 그것에 비해 최저 2배에서 3배 되어야 한다. 남북한의 경우는 심지어 6배 필요 전력론까지 있다.
3)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는 지구전 또는 전면전을 계획할 때, 전쟁 과정에서 군사력으로 전환 투입될 국가의 총자원(민간부문 자원·능력)이 남한보다 월등 우월해야 한다.
4) 전쟁 당사자 쌍방과 관련된 현시점에서의, 그리고 가능한 예상할 수 있는 전쟁 기간 중의 국제적 조건과 환경이 북한에 유리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5) 승리를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전쟁행위의 결과로 예상되는, 또는 사전 계산된 전쟁 피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전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가치가 우월해야 한다. 즉 우리가 전쟁을 기도한다면, 그 결과로서 북한이 예상·기대하는 통일의 형태가 북한뿐 아니라 남한까지를 합친 한반도의 전쟁 파괴의 피해와 그 장기적 복구 건설에 들 희생의 양보다 월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6) 위 다섯 가지 조건을 무릅쓸 각오와 그 계산 위에서도 전쟁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전쟁의지’는 1)∼5)가 우월할 때만 보장되고 그 반대일 때는 약화된다.
과거의 몇 가지 사례를 이 6가지 준거에 비춰보면,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파시스트와 일본은 각기 1)과 2)의 조건은 갖추었으나, 3)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 실패했고,
- 북한의 6·25 침공은 1)·2)·3)의 조건 위에서 개시되었으나 4)의 조건 때문에 실패한 약소국의 전쟁이었으며,
- 이승만 대통령(1948∼1960)은 1)·2)·3)의 조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서 ‘북진통일/무력북침’을 밤낮으로 부르짖기도 했으며,
- 1988년 7월에 끝난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은 그 당사자 어느 쪽도 1)·2)·3)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강행한 무모한 전쟁이었다.
- 국제적 조건과 환경인 4)는 작은 나라일수록 크게 작용하는데, 현대전일수록 국제적 조건의 평가를 도외시하고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강대국도 그렇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실패한 예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반세기의 신화/리영희/삼인/1999/184∼186쪽)
어떻든 북한은 남한이 갖지 못한 핵무기를 개발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 핵우산 하의 남한을 공격했다가는 그 수십 수백 배의 보복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야당의 정치공격성 멘트인 ‘안보붕괴설/안보폭망설/안보위기설’ 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은 꼭 위 준거대로만 전개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강대국의 어떤 우월한 전력도 인간의 결연한 의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항우의 ‘파부침주(破釜沈舟)*’전법이나, 월남의 ‘디엔비엔푸 전투**’일 것이다.
따라서 위 논리들을 우리의 상황에 대입해 보면, 화해와 평화정책만이 최선의 방안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 핵무기 개발론 2) 북 주적론, 3) 9․19 남북군사합의 폐기론, 4) 남북화해 정책 폐기론 등을 함부로 주창할 수 없음도 알게 된다. 하긴 어느 아나키스트의 “전쟁은 국가의 주업이기 때문에 국가를 건강하게 해 준다”는 말처럼 강대국들은 언제나 전쟁을 선호하지만․……
* 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이 전법은, 항우가 3만의 군사로 30만을 거느린 진나라 장수 장한과의 싸움에서 쓴 것이다. 항우는 장한과 싸우기 위해 강을 건너자 3 일분 식량만 남긴 다음,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3일 뒤에 진나라 솥을 빼앗아 밥을 해 먹는다"고.
** 디엔비엔푸 전투: 1953년 5월 프랑스군은 베트남 식민지배 강화를 위해, 하노이 서쪽 300Km 지점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만들고, 15,000명이 넘는 병력과 야포, 전차, 비행중대를 배치하는 한편 외곽엔 49개 거점을 연결하는 방어진지까지 구축하여 북부 산악지대 게릴라를 제압하려 했다.
이에 대항한 베트남군은 원시적 농업부족 집단이나 다름없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호지명은 프랑스군이 한 곳에 집결해 있을 때 결판을 내기로 하고, 그해 겨울부터 디엔비엔푸를 향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완전 군장을 한 군인들은 프랑스 공군기의 감시를 피해 낮엔 30km, 밤엔 50km씩 하루 80km를 이동하였다. 식량 운반책인 민간인들은 20kg의 식량을 짊어지고 하노이에서 출발하여 1,000여 Km를 우회하며 디엔비엔푸에 도착했을 때는 등에 식량이 겨우 2kg밖에 남지 않았다. 18kg은 행군 중 양식으로 소모했기 때문이다. 고작 한 병사의 3, 4일 치 식량을 위해 목숨을 걸고 3,000리 길을 걸은 것이다.
이렇게 이동한 지 3개월 20일 만인 1954년 3월 13일, 베트남군은 공격을 시작되었다. 그런데 부족한 화력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맨 앞에 배치하다 보니, 비탈을 올라가던 대포가 뒤로 밀려 올라오던 병사를 덮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밀려 내리는 대포 바퀴를 몸으로 막음으로써 뒤따르던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
이렇게 두 달여에 걸친 전투로 베트남군은 전사자 8,000여 명, 부상자 15,000여 명이었고, 프랑스군은 전사자 2,300여 명, 부상자 5,100명, 포로 10,000여 명이었지만 결과는 베트남군의 승리였다. 이에 놀란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 베트남군의 불굴의 용기와 의지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미국은 그 뒤, 이곳에서 20여 년간 싸웠지만 허둥지둥 패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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