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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Sisyphos & Amor Fati

 

인간은 1) 식의주의 효율적 해결과, 2)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 3) 더 낳은 문화생활 등, 4) 전반적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5) 앎(지식)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 우주/자연/존재를 아는 만큼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조정/지배/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2,000여 년간의 서양 전통철학은 모든 존재를 비롯한 진리, 선악 등이 객관적 존재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이론적/이성적으로 발견하고 알아낼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바로 이성중심주의(logocentrim) 철학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달라진 인식론에 의해, 진리/선악 등이 객관적 존재나 발견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즉 우리들의 앎(지식/참된 앎:진리)이,

1) 대상인 우주/자연/존재에 대한 경험을 언어로 바꿔 놓은 것,

2) 대상을 언어로 의미화/관념화/개념화하고 재해석 해 놓은 것,

3) 대상인 존재차원을 언어라는 의미차원으로 바꿔 놓은 것,

4) 즉 대상인 물질을 언어로 추상화한 것이라는 점 등을 알게 된 것이다.

 

푸코의 지적처럼 앎이, ‘대상을 의미화 한 당사자의 성격, 성장과정, 생활환경, 사회적 위상, 이념적 잣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종교/철학적 맥락, 실천적 필요성 등에 따라 만들어진 가변적/상대적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앎이나 진리는 객관적 존재도 아니고, 발견의 대상도 아니며, 절대적/보편적/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설 같은 픽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오류일 수 있다(파스칼)’, ‘모든 진리는 수많은 해석중 하나다(니체)라는 평 처럼.

 

그런데 이러한 앎을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여기에 넘어설 수 없는 문제가 끼어 든다. 즉 의식은 대상(물질)과 다른 차원에 있어야만 앎을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의식은 대상인 존재로부터 이탈되어 소외의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 즉,

헤겔이 말한 인간의 본원적 소외(疏外/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잃고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는 일/헤겔이 처음 사용한 말)와, 사르트르가 말한 대자가 즉자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망한 욕망이다.

 

 

헤겔은 우주 만물현상을, 1) 그 실체인 ‘절대정신’이, 2) 스스로 분화/이탈되어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를 세워 일으키는 대립관계를, 3) 다시 극복해 가는 무한과정으로 보았다(물론 그 과정을 역사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주체는 인식체로서 그것의 반대인 객체라는 대상을 갖는데, 이 때의 인식체와 그 대상의 관계를 소외관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식체가 인식대상을 가질 때,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자기 아닌 타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는 자기이탈 혹은 자기분열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소외는 원천적인 것이어서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우주라는 존재의 양태를 즉자와 대자로 나눠 그 본질을 규명하려 했다. 즉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적 존재를 즉자로, 그 즉자를 인식하는 의식적 존재인 인간을 대자로 나눈 것이다. 이 대자는 의식적 존재기 때문에, 1) 그 특성이 자유다, 2) 따라서 인간은 <자유=>선택=>불안=>책임=>책임회피=>자기기만>이라는 등식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3) '자유롭도록 처형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딜레마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인 대자는 끊임없이 즉자가 되려는 불가능한 욕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우주의 일부인 존재적 차원이면서, 그 우주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미적 차원의 존재라는 기이한 존재다. 이러한 인간의 소외를 생각해 보면, 마치 '시시포스/Sisyphos 같은 운명을 사랑/Amor Fati'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 다다르면 골짜기로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어깨에 메고 산정을 향해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니 말이다.

 

따라서 삶은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 존재인 대자가 비의식적 존재인 즉자가 되려는 몸부림과도 같다. 그러니 인간은 1) 힘겹게 바위를 메고 산정을 향해 오르는 과정에서 2) 그때그때의 일시적 성취감이라는 꿀물에 만족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가엾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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