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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사일士 一이와 공일工一이는…

두어 달 전, 후배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형님, ‘괴퍅’을 한자로 쓸 수 있어요?.”

“그거 우리말 아니던가?”

“그럼 ‘수염’은 요?”

“그것도 우리말……”하자, ‘乖愎/鬚髥’자를 써 보이는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처음 본 글자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국가공인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3,500자) 책, 초등학생용 10칸 공책, 붓펜 한 묶음을 내놓으면서 심심풀이로 한자쓰기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자는 뜻(意)과 소리(音)와 모습(形態)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 세계 유일의 표의문자(表意文字)다.

그래서, ‘樂’자가 ‘악’일 땐 음악, ‘락’일 땐 즐거움, '요’일 땐 좋아함이 되기도 하고,

‘회자膾炙’는 ‘고기를 회치고 구워서 먹는다’는 뜻이지만, ‘글귀나 말이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또한 글자의 조형미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되기도 했다.

본고장인 중국의 서예書藝는 차치하고, 한국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끌로 쪼아 낸 듯 한 선운사 부도 비문(華嚴宗主白波大禪師大機大用之碑)은 가히 신필을 연상케 한다.

한자의 조형성을 모티프로 한 문자추상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한국화가 이응로와 서양화가 남관의 작품도 있다.

또 캔버스 소지(素地)에 한자/해서/인쇄체 글자와 극사실의 물방의 앙상블을 연출한 김창렬의 작품 등 수없이 많다.

 

후배를 보내고 TV 자막에 나오는 한자말들을 손바닥에 써 보았다. ‘아뿔싸!’

헷갈리는 글자가 한두 자가 아니었다.

오래 전, 고교 국어 시간에 외운 유산가(遊山歌)는 지금도 야외나 산에서 “花爛春盛하고 萬花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山川景槪 구경 가세……”하면서 호기롭게 완창 해 친구들 박수를 받기도 하고,

般若心經 260자도 완벽하게 외워서 심심할 때마다 종이나 손바닥에 지두법指頭法으로 써 보곤 하는 한자 실력(?) 아니었든가……

 

돌이켜 보면 그간 사회생활이나 어설픈 글쓰기를 하면서 한자말을 써 오긴 했지만 모두 한글로만 써 왔다.

더욱이 컴퓨터가 나오면서 어언 30여 년째, 자판만 두들기다 보니 필사 능력도 형편없이 퇴화했다.

그러니 乖愎이니 鬚髥은 고사하고, 많이 쓰이는 懷와 壞와 壤자의 획을 혼동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긴 옛날 서당서는 ‘수壽’ 자의 획을 외우기 위해 “사일士一이와 공일 工一이는 구촌口寸이다”라는 식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데……

 

‘堂狗三年이면 吠風月한다’지 않던가, 매일 한 두 시간씩 두어 달 한자쓰기를 해 봤다.

그랬더니 형편없는 한문 실력이 드러나면서 많은 아쉬움도 일었다. 예를 들면 ‘낭패(이리狼/이리狽)’나 창궐(미칠猖/날뛸獗)을 한글인 ‘낭패/창궐’로만 써 옴으로써, 그 낱말이 지닌 깊고 오묘한 뜻과 소리와 형상(이미지)을 놓친 점들이다.

 

그렇다. '세계는 언어가 있는 곳에만 있다(하이데거).'  또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비트켄슈타인).'

우리의 앎/지식/인식이라는 것이  ‘우주/자연/존재라는 대상이 의식에 의해 언어로 무엇 무엇이라고 서술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말의 대부분인 한자말인 ‘낭패’와 같은 것들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써왔으니, 세간산들 제대로 알았겠는가. 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오늘자 신문엔 “사흘 쉰다고 했으면 4일 동안 쉬는 것 아니냐?”는 게 실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3,500자를 한 두 달간 써 보면서 새롭게 그 의미를 돌아보게 된 것으로는,

초췌/憔悴, 수척/瘦瘠, 상쾌/爽快, 포복/葡匐, 골몰/汨沒, 짐작/斟酌, 구차/苟且, 맹랑/孟浪, 앙숙/怏宿, 요행/僥倖, 기구/崎嶇, 비루/鄙陋, 소박/疎薄, 교활/狡猾, 틈입/闖入, 빈축/嚬蹙/顰蹙, 외설/猥褻, 야유/揶揄, 악착/齷齪, 유린/蹂躪, 창피/猖披, 은근/慇懃, 민망/憫惘, 삭뇨/數尿/澁尿, 신기루/蜃氣樓 등이 우선 눈에 들어 왔고,

 

평소 무심코 헷갈리게 써 온 글자로는, 자刺/랄剌, 영潁/穎, 위戍/술戌, 전傳/부傅, 헌獻/희戱, 제齊/齋, 반攀/礬, 자炙/구灸, 회懷/양壞, 살撒/철撤, 용舂/춘春, 우又/차叉, 면麵/麪, 수遂/축逐, 연緣/녹綠, 조爪/과瓜, 견狷/창猖, 한狠/랑狼, 쇄洒/주酒, 도徒/사徙. 왕尢/우尤, 골汨/율汩, 기己/이已/사巳, 강綱/망網, 안眼/면眠, 박薄/부簿, 기畿/幾, 홀忽/총怱 등도 눈에 띄었고,.

 

또 명확히 구분치 못하고 무심히 사용했던 것으로, 망연茫然/惘然, 영악獰惡/靈惡, 경위涇渭/經緯, 고용雇傭/雇用, 질탕跌宕/佚蕩, 노획擄獲/鹵獲, 노략擄掠/鹵掠, 종적蹤迹/縱跡, 묘연渺然/杳然, 황홀慌惚/恍惚/怳惚, 쾌유快癒/快愈, 지혜知慧/智慧 등도 눈에 들어왔다.

 

'한글전용이냐, 국한혼용이냐?'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그러나 ‘시발노무색기/始發奴無色旗’라는 고사도 욕설 변용이 가능한 게 한자이고 보니 당분간은 쓰기 연습을 그치지 못할 것 같다.

 

Text image/고 이응로 화백의 문자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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