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사실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것을 오해라고 한다.
실제와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다.
이런 오해와 착각은 삶의 낭비와 왜곡을 불러온다.
대표적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인식(앎)이 아닐까 한다.
우리들 삶의 양과 질은 우주/자연/존재에 대한 인식의 양/질과 정비례한다.
우리는 자신이 안(인식한) 세상만큼만 살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식한 것을 '우주 /자연/존재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오해/착각해 왔다.
즉 우리가 인식한(언어) 산이나 물을, 객관적 존재로서의 산이나 물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프로타고라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비트겐슈타인, 쿤 등의 철학자들은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혀 냈다.
1) 인간이 알고 있는 물은 객관적 존재로서의 물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언어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2) 물이라는 개념이나 관념은 인간이 마셔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이 아니라, 의식의 특정 양태로서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3) 인간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현상이나 사건도 객관적 대상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적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4) 지각적/논리적으로 인식한 세계도 인식 이전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따라서 인간이 우주/자연/존재의 수많은 존재들을 a/b/c라는 언어(개념/관념)로 부른 것은, 이미 그렇게 부르기 전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돈상태’를 전제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은 오늘의 양자역학도 동의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선,
"우주의 궁극적 속성일 거라는 정신이나 물질을, 서술할 수 없는 무한수의 미립자나 초끈으로 설명하면서, 그 무한수의 존재나 존재 상호간의 무한수적 관계를 ‘흐리멍덩하고 혼란스러운 카오스’ 같은 거" 라니 말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오해/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많은 의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정언명령같은 명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또 객관적 존재라고 믿어 온 진리도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든 하나의 관념임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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