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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한 노 교수의 질문

‘인생에는 왜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이 꽃은 무엇이고 저 나무는 무엇인가?’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 수상, 영국 왕립학회 회원, 옥스퍼드대 생리학 명예교수, 나이 85세인 데니스 노블이 위 질문들을 안고 한국의 사찰(봉은사/통도사/실상사/백양사/미황사)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오래된 질문>/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장원재/다산초당/2012)

 

소위 세계적 석학이라는 사람들이 노년에 이런 질문을 내놓는 걸 볼 때면 마음이 착잡해 진다. 

1) 한 분야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사람이 왜 늙어서까지 그런 질문을 해결치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

2) 왜 이런 질문을 철학 아닌 종교로 해결하려 하는 걸까 하는 생각,

3) 왜 스스로 해결치 못하고(않고) 남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블 교수는 사찰순례를 마치고, “삶에는 늘 근심과 고통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우리는 고통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더라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진 않도록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데 까지는 도달했다고 한다.

 

그러면 보통 사람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조금도 주눅들 필요 없을 것 같다. 모든 문제/질문은 풀리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어떤 어려운 질문도 인간은 잘 해결해 오면서 생존해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삶의 문제는 우리의 삶만 잘 성찰해 보아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자들이 내놓은 인식론/존재론/관념론 등을 공부해 보면 얼마든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문제들은 정답 보다는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몇 가지 철학적 성찰들을 떠올려 봤다.

첫째는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교리 아닌 철학이론으로 공부해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인간의 인식능력 밖의 초월적 존재(신/내세/천국/부활)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반해, 붓다(佛) 가르침(敎)은 인식 가능한 현실적/실제적인 것에 기반을 둔 이성적/논리적/합리적/과학적/심리적 철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생고에 대한 진단과 처방인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팔가 그 좋은 예다.

1)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가지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 여덟 가지가 있다.

2) 괴로움은,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에서 온다.

3) 갈애를 없애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지족/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4) 갈애를 없애는 방법에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여덟 가지 수행법이 있다. 이 외에도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교화하려는 사람인 보살(승려)들은 여덟 가지 수행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육바라밀六波羅密(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을 더해 수행하기도 한다.

또 마음의 속성을 논리적/합리적/과학적/심리적/철학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이다. 마음은,

1) 푸시킨의 시구(……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현재는 괴로우며/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그리운 법이니)처럼, 지금/여기에 있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나 과거에 있으려 한다.

2) 또 언제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추구만을 거듭할 뿐, 지금 가진 것에는 만족을 못한다.

3)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지금/여기의 삶’을 건너뜀으로써 진정한 삶을 놓친다. 이런 점들을 명징하게 이해만 해도 위와 같은 질문으로 고민하는 일은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종래의 이원론(물질/정신) 대신, 1943년 사르트르가 구체적 인간 경험 분석(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내놓은 존재론(存在/즉자 VS 無/대자)을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자연/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인간의 근원적 한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은 우주/자연/존재를 1) 의식 대상으로의 존재인 즉자와. 2) 그것을 의식하는 존재인 대자로 나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가 존재(대상/공간 속의 사물과 시간 속의 사건/칸트)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인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즉자란, 산/들/나무/책상/의자 등의 의지나 의식이 없는 대상적 존재, 그리고 사자/호랑이/소/말처럼 본능적인 것만 좇을 뿐 무엇이 필요하다거나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즉자는 의식/욕망이 없는 존재기 때문에 그 자체로 충만하고 결핍되지 않는 완전한 존재라고 한다. 반면,

대자란, 의식으로서의 존재인 인간으로, 1) 의식과 함께 구체적 육체/성별/시대/장소/가정/환경 등의 조건을 갖춘 존재기도 하지만, 2) 주체성인 자유의지도 가진 존재이고, 3) 또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기 때문에 무(無)적 존재다고 한다.

이런 속성 때문에 대자인 인간은, ⌜자유 의지=>선택=>책임=>불안=>도피⌟라는 등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즉 인간(의식적 존재/대자)은,

1) 언제나 만족을 못하는 결핍된 존재로 있을 수밖에 없다.

2) 선택에 따르는 책임과 불안 때문에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하다.

3) 그래서 자신이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고 자기기만을 하지만 이도 무위로 돌아간다.

4) 결국 대자를 벗어나 즉자가 되려고 해 보지만 이 또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5) 따라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처형된 가엾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삶의 만족과 희열을 취하는 존재다. 

1) 이카로스가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솟구쳐 오르면서 희열을 맛보고,

2) 시시포스가 도로임을 알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바위를 반복해서 들어 올리면서 승리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장 폴 사르트르/정소성 역/동서문화사/1994)

 

셋째, '이 꽃과 저 나무는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선, 분석철학(언어철학)을 공부해 보는 것이다. 지난 2,000여 년 간의  전통철학에서는, 꽃/나무/신/진리 등을 객관적 존재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철학의 본령을 그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믿어 왔다. 그것이 20세기 분석철학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존재한다고 알고(인식)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에 포착돤 대상이 언어로 무엇 무엇이라고 의미화/관념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를 모르는 갓난아이가 나무/꽃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논리다. 

1) 우리가 ‘진리/꽃/나무…’라고 알고 있는 존재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언어로 만들어 낸 의미물이고,

2) 우리가 불변의 진리라고 믿어 온 것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고, 숨어있는 것을 찾아낸 것도 아니고,

 ‘인류공통의 의미체계인 언어를, 그 언어의 규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반응하고 지각하는 사물에 적용한 경우’이니 말이다.

하긴 이런 점들을 잘 이해한다고 해서 삶의 괴로움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긴 하다. 따라서 삶이란 것이, 낮이 있음으로써 밤이 있고, 죽음이 있음으로써 삶이 있고, 즐거움 또한 괴로움이 있음으로써 성립된다는 역설적/상대적이라는 것만 받아들여도 어느 정도의 의식의 자유는 얻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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