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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주눅 들 거 없다

기라성 같았던 옛 선지자들은 우주/자연/존재의 궁극적 속성을 이렇게 표상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  힌두교는 범천/Brahman,  노자는 도/道,  붓다는 공/空,  공자는 태극/太極,  예수는 신/神/Jehovah/Yahwah/Yhwh,  스피노자는 본체/substance, 헤겔은 절대정신/Geist,  하이데거는 존재/Sein,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등으로.

이런 형이상학적 표상은 보통 사람인 우리를 한없이 겁먹게 하고 주눅 들게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많은 이론서를 읽어 봐도 이해 할 수가 없기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우주/자연/존재)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1) 그 대상을 다른 것과 비교/구분/범주화 해서,

2) 언어로 ‘무엇’이라고 표상해야 하는데,

3) 우주/자연/존재는 하나(일원적)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없어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궁여지책(?)으로 위와 같은 비유로 표상한 게 아닐까?

 

한 예로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따져 보면 이런 식이다. 그는 우주/자연 존재의 본성을 ‘역동적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라고 표상했는데 그 이유는,

1) 소우주(microcosm)인 인간은 대우주(macrocosm)의 일부이고 축소판인데,

2) 소우주인 인간의 생명/삶의 본질은,

3) 싱싱하고 자유로운 힘의 거침없는 행사로,

4) 삶을 환락의 축제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역동적 움직임의 원천인 '힘'을 의인적 비유인 ‘권력에의 의지’로 표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자연/존재의 궁극적 속성은 영원한 신비다. 인간이 인식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 의미화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보통 사람인 우리들도 각자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레 주눅 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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