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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소외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삶이란 ‘앎에 기반 한 일을 통해 식/의/주를 해결하고, 생존과 번식을 도모하며, 나아가 자아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효율화를 위해 앎/지식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왔다. 아는 만큼 자연을 조정/통제할 수 있고 안락한 삶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앎의 확장 과정에 치명적 독소가 끼어들었다. ‘소외/疏外(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잃고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라는 것이다.

왜일까? 인식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하늘은 푸르다’라고 하는 것(앎/지식)은, 하늘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인간이 인식해 언어로 ‘푸르다’라고 의미화/관념화/개념화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1) 미지의 존재 차원의 대상을 의미 차원의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고, 2) 구체적/사물적 존재를 언어로 추상화 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E=mc²(에너지=질량☓광속의 제곱)/1905>라는 것은, ‘모든 질량은 그에 상당하는 에너지를 가진다’는 현상을 문자로 추상화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 분석철학이 나오기 전, 2,000여 년 간 서양의 철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다’라는 언어(추상적)가 곧 하늘의 색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대상과 인식, 존재와 의미를 동일시 한 것이다.

따라서 유용한 앎/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식은 대상/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의식이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있다면 인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의식은 사물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것을 추상화된 앎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앎을 추구하면 할수록 의식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소외(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벗어나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것)인 것이다. 이처럼 소외(疏外/alienation)라는 개념은 조금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소외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헤겔도 이렇게 말했다. 우주란 1)  절대정신(Geist)이 스스로 분화/이탈되어, 2)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를 세워서 생겨난 대립관계를, 3) 다시 극복해 가는 무한과정인데. 그 과정에서 4) 인식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소외관계가 되었다. 즉 인간이라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이 될 때,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타자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상인 인간은 자기이탈적/자기 분열적 존재인 소외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르트르 또한 이렇게 했다. 우주의 모든 존재(사물/사건/현상)는, 1) 의식적 존재인 대자(인간)와, 의식을 갖지 않은 모든 사물(동식물 포함)적 존재인 즉자로 나누어지는데, 2) 대자는 대상과 떨어져 나와 그것을 의식할 때만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3) 이처럼 대자가 즉자로부터 이탈된 상태를 ‘소외적 관계/상태’라고.

헤겔의 소외는 우주의 존재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결정론적 개념인데 반해, 사르트르의 소외는 인간의 존재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개념인 셈이다. 이렇게 소외가 우주적/인간적 존재조건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결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즉 인간의 소외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천형/天刑이기도 하다.

그래서였던가? 이런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다.

헤겔은 ‘불행한 의식이 우주 현상의 필수조건임을 자각함으로써, 그 불행을 스토익(stoic/평온한 마음과 도덕적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일 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사르트르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소외된 인간조건이긴 하지만, 각자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면서 그것을 긍정적 가치로 바꾸는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외에 전혀 다른 접근을 한 학자가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데 그쳤다. 이제부터 철학이 할 일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1848/공산당선언).’라고 말한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 마르크스(1818~1883)다.

1) 생존을 위한 물질생산 수단인 신성한 노동이 2) 노동시장에서 상품이 되면서 3) 노등은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어 4) 목적과 수단, 인간과 상품의 관계가 전도된 상태가 되었다. 5) 따라서 전도된 관계만 바꾸면 소외는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여전히 인간은 소외 속에 허덕이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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