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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고!?

 

“나 요즘 죽지 못해 살어~” 아들의 부채를 떠안게 된 친구의 넋두리다.

한 참을 지나 친구가 덧붙인 말은“너, 이게 반어법이란 거 알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구치소로 간 전직 대통령, 사업에 실패해 알거지 된 사람, 친구로부터 왕따 당한 아이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한 사람 등 모든 사람이 죽음을 입에 올린다.

 

이런 유혹을, 1) 프로이트는 죽음을 향한 본능(Thanatos)과 생명을 향한 본능(Eros)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보았고,

2) 사르트르는 즉자(물질적 존재로서의 욕망)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대자(의식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욕망)로 있기를 원하는 모순된 구조로 보기도 했다. 즉 살려고 하면서 죽으려 하고, 죽으려고 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얘기다.

 

흔히들 죽음을 1) 심박동의 정지(의학), 2) 의식의 완전한 상실(심리학), 3) 뇌세포 활동의 정지(생물학), 4) 유기체가 무기체로 바뀜(물리/화학) 5) 유有가 무無가 됨(현상학/철학/형이상학) 등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삶과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죽음은 어느 면으로는 논리가 아니라 본능이며, 생의 집착과 죽음 거부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키르케고르는 '삶은 죽음의 병'이라고 했고, 파스칼은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쇠사슬에 묶여 자신의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다'라고도 했다. 즉 탄생이 죽음의 서막이라는 얘기다. 이에 따라 삶의 속성을 ‘고해(붓다)’와 ‘불안(사르트르)’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고통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설이 성립되기도 한다.

 

어떻든 인간은 죽을 힘을 다해 죽음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영생설과 윤회설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 를 믿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믿음이란 ‘논리가 근거 없이 비약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란 심리적 안정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설(가르침)들은 여전히 힘을 발휘라고 있다. 여기서 윤회설에 대해 일별/一瞥해 봤다.

 

 

# 1. 해인사 안거가 끝나던 날, 향봉 스님이 성철 큰스님께 물었다.

“저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도저히 못 믿겠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성철스님이 답했다.

“너 이놈, 중노릇해 먹기 힘들겠구나. <브라이디 머피를 찾아서>라는 책도 못 읽어 봤느냐?”*

성철 스님 말씀은, 사람은 이승에서 행한 업적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여섯 개의 세계(地獄/餓鬼/畜生/阿修羅/人界/天界)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 2. 궁금해서 <브라이디 머피를 찾아서>라는 책을 찾아봤다. 그러나 못 찾았다. 그 땐(1890년대) 출판이 안 됐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연히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다가 <사후세계/한갑진편역/한진출판사/1980>라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1950년 미국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의 최면 카운슬러 모레이 번스타인이 최면치료를 위해 루스라는 한 중년 연인의 과거를 기억하게 했다. 많은 대화가 오가던 중 이런 대화가 나왔다. 번스타인이 물었다.

“…… 지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루스.”

루스 말했다.

“…… 나를 루스라고 부르다니요?” 농담 마세요. 난 루스가 아녜요. 코크에 사는 브라이디 머피예요.”

놀란 번스타인은 코크라는 곳을 찾아봤다. 아일랜드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날아가 브라이디라는 여인을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루스가 최면상태서 말한 내용과 일치하는 여인이, 19세기 중엽 살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당시 미국서 큰 화재거리가 되었었다는 얘기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었다.

 

# 3. 철학자 김용옥이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불교가 심리학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심리학의 궁극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열반(Nirvana)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입니다.”

“열반이 마음의 상태라고 규정하신다면 우리가 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번뇌도 곧 보리가 되는 것이므로 윤회도 사라져 버릴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이르든지 간에 그 마음의 상태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즉 윤회하는 것은 미묘한 마음인 미세마음(Subtle Mind)입니다. 중략 …… 인간의 생명이란 기의 집합체이고 죽음은 곧 기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들어간 백(魄/신체적 부분)은 흙이라는 기로 흩어지고, 하늘로 날아간 혼(魂/정신적 부분)도 대기로 흩어집니다. ……”

“ 윤회하는 것은 바로 그 미세마음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이그잭틀리(Exactly)! 윤회를 하는 것은 미세마음이지, ‘나’라고 하는 개체(self)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미세마음이 새로운 신체와 결합하게 되면 그 마음은 새롭게 자라고 성장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의식의 상태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티베트 라마교 초대 교주이자 통치자였던 달라이 라마(게뒨둡파)의 14번째 환생이라는, 지금의 달라이 라마(텐진걈초)와 김용옥의 대화 일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윤회설을, 1) 현세의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난 안락한 내세에 대한 갈망과, 2) 당시 기득권자들의 지배질서 유지의 필요성에서 나온 일종의 허구와, 3)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를 위한 장치로 만들어 진 설(說)이라고 한다.

 

우리가 인식을 통해 얻은 ‘앎/지식/진리’란, 경험(대상)을 의미화 하여 언어로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앎(서술)은 사물/사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일 뿐 아니라 결정론적이고 인과론적이다. 그래서 경험을 통해 실증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하늘은 푸르다’는 앎이 실증을 통해 검증되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죽어서 윤회한다’는 것(서술)은 검증되지 않는다. 아니 검증할 수가 없다. 인식의 대상인 윤회가 실제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믿느냐, 안 믿느냐’는 각자 선택의 문제긴 하지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1) 아무리 유명하고 특별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논리에 어긋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격해야 의식이 자유를 누릴 있다는 생각, 2) 윤회란, 우주 만물이 끝없이 다른 형태로 전변하는 것일 거라는 생각, 3) 즉 사람이 죽으면 흙이나 벌레의 먹을거리로 바뀌고, 그것은 식물의 거름이 되고 또 다른 동물/인간의 먹을거리로 순환하는 것이 윤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이향봉/밀알/1981>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3)/김용옥/통나무/2002>

◘ Text image/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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