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인생 4주기론이 있다. 인생을,
1) 태어나서 삶의 지식과 지혜를 전수받는 학습기(學習期)를 거쳐,
2) 가정을 꾸리고 사회활동을 하는 가주기(家住期)를 보낸 다음,
3) 삶이 근원적 문제를 찾고 해결하기 위해 숲에서 구도와 명상을 하는 임서기(林棲期)로 보내고,
4) 마지막 단계로 세속적 집착을 모두 버린 유랑기(流浪期)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철학적 종교적 인생 주기론이다.
이에 대입해 보면 지금의 나는 임서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학습기와 가주기엔 기별 과업에 골몰해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근원적 문제들을 은퇴 후 십수 년 째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 인생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2) 그 의미는 무엇인가? 3)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4)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5) 어떻게 살 것인가? 6)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문제들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철학과 종교에 많이 나와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1) 물리적 우주 전체의 본질과 작동원리를 밝히는 것이고,
2)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고,
3) 우주/인생에 대한 궁극적 해답을 찾는 것이고,
4) 바람직한 삶의 양식이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고,
5) 인생관을 고안하고 /구축하는 것이고,
6) 우리는 무엇이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답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도,
1) 물리적 존재가 아닌 형이상학적 존재라 할 초월적 타계에 대한 믿음이며,
2) 현세와 타계(他界)를 관리하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며,
3) 의식과 제의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는 이론적/실천적 신념체계기 때문이다.
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철학적인 가르침으로는,
1) 감각적 현상세계를 넘어 영원불변한 가지적 실체인 ‘이데아(idea)’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고 가치라는 플라톤의 가르침,
2) 이성이 빛이 보여주는 ‘정언적 명령(定言的 命令)’이라는 도덕적 규범에 따라 사는 것이, 사람됨을 나타내는 길이라는 칸트의 가르침,
3) 철저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라는 사르트르의 가르침,
4) 위 1)/2)/3) 등 모든 철학적 가르침은 새빨간 거짓말이니 그것에 속지 말고 선악의 인위적 경계를 넘어 춤추는 ‘초인(超人)’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기초월적 삶이라는 니체의 가르침 등이 있고,
주종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 가르침으로는,
1) 우주의 창조자이자 관리자인 전지/전능/전선한 절대적 인격신을 믿고 따르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 유대교/기독교/회교가 있고,
2) 절대적 진리가 영원히 순환하는 존재로서의 브라만/무아/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친 힌두교/불교가 있고,
3) 우주의 원리에 의해 모든 사람(남녀/노소/사회계층)에게 주어진 도덕적 규범에 맞추어 살면,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 유교가 있고,
4) 우주적 질서의 보편적 원리에 따라 억지 없이 무위(無爲)로 살면, 우주와 원초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 도교 등이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위의 가르침 중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에, 의지하고 매달리고 따르면서 위로받고 축복받으면서 살고 죽는다. 나도 2, 30대엔 위 가르침 중 하나를 선택해 보려고 했었다. 예를 들면 기독교나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모든 근심을 잊고(?) 감사와 축복(?) 속에 사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것이 한없이 부럽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었다. 지금까지도 선택을 못 하고 암중모색과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
일반적 선택 기준이라 할, 1) 진/위를 가르는 인식적 기준이나, 2) 선/악을 가르는 도덕적 기준이나, 3) 미/추를 가르는 미학적 기준에 비춰 아직까지도 ‘글쎄?’기 때문이다.
1) 전지/전능/전선 하다는 인격신이나, 무아/無我나 무無 그리고 진리 등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고,
2) 그것들의 진위를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고,
3) 상충하는 답 중 어느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 판별할 수 있는 기준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유=>선택=>책임’에 따르는 실존적 불안을 해소할 결정적 ‘한방’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은 가치선택이고, 그 선택엔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던가.
한 예를 들면 이런 점이다. 20세기 초 등장한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어떤 낱말이나 명제의 언어적 의미는 지시대상에 있다고 한다. 즉, ‘호랑이’라는 낱말은 구체적인 호랑이와 연결되었을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신’이라는 낱말은 그것과 연결되는 구체적 지시대상이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언어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도,
1) 위 종교서 말하는 인물/사물/사실/사건이 아닐 뿐 아니라,
2) 객관적 대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 다만 대상이 의식에 의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의미화/재해석/재구성/관념화된 것 아니던가.
4) 따라서 구성자의 시대/공간적 상황, 민족/국가적 제약, 사회적 여건, 개성, 성품, 감성, 필요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가변적인 것 아니던가. 니체 말처럼 진리도 ‘많은 해석 중 하나’가 아니던가.
5) 또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려면 반드시 경험이나 증명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공동체에 의해 입증도 되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경험할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고 보니, 선택을 위한 암중모색과 방황만 계속된다. 다만 지금은 붓다의 가르침인 <사성제(苦/集/滅/道) 팔정도(正見/正思惟/正語/正業/正命/正念/正精進/正定)>가 합리적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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