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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클래식과 선시

 

오후 2시부터 4시 사이, 집 가까운 숲길을 걸으면서 KBS1 FM의 <명연주 명 음반>을 듣곤 한다. 이때는 듣기와 걷기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이 시간을 “음아불이(音我不二)/보아불이(步我不二)”라고 명명해 보기도 한다.

 

그럭저럭 클래식 음악을 들어 온 것이 벌써 50여 년이 된다. 그런데도 점점 더 좋아진다. 아마 클래식 음악의 감동 기제라 할, 변화와 반복을 기조로 한 <제시=>전개=>재현=>종결>이라는 소리전개 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일종의 작곡형식으로 흔히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이라는 것이다. 교향곡에서 주로 1악장에 적용하기 때문에 1악장 형식(first movement form)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물론 다른 악장에 써서 안 되는 건 아니다. 4개 악장 모두를 이 형식으로 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3번(스코틀랜드 교향곡)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음이 <제시=>전개=>재현=>종결>로 전개 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요약해 보면,

 

1) 제시부에서 전개될 음을 예측케 하는 짧은 서주에 이어(없는 경우가 많음) 남성적이고 다이내믹하고 인상적이고 외우기 쉬운 음(제1주제)이 나오고, 이어 짧은 다리(經過 句/bridge)를 놓는다. 제1 주제에서 제2 주제 음으로 곧바로 넘어갈 때 기억 속 잔향 효과가 거부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어서 여성스럽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편안한 음(제2 주제)에 이어 또 다리를 놓고, 중간을 마무리(codetta/작은 coda)한다.

 

2) 전개부에서는, 작곡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환상적인 선율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야말로 압권 부다. 제시부의 1·2주제 음은 간데없고 주음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간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제시부에서 익숙했던 음이 사라지면서 긴장과 불안, 방황과 집중 속에서 감정을 고조시켜 간다.

 

3)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에서 익숙했던 1주제와 경과 구, 2주제와 경과 구를 조금씩 달리해서 재현·회상하고 전개부의 업적(?)도 정리한다. 따라서 청중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서정주/국화 옆에서)’처럼(?),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는다. 처음 경험했던 음을 다시 접할 때 얻는 안정감이다. 이렇게 제시부와 전개부를 재현·정리하면서 거창한 코다(coda)마무리(종결)하면, 듣는 사람은 안정감과 함께 고양된 환희를 맛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음을 들으면서, 문득 아래 선시(禪詩)를 떠올려 본다. 음의 전개과정과 불교의 깨달음 과정에 유사점이 있지 않은가 해서다.

산시산 수시수 (山是山 水是水)

산불시 산 수불시 수 (山不是 山 水不是 水)

산시 수 수시 산 (山是 水 水是 山)

산시산 수시수 (山是山 水是水)

 

1) 총괄적 의미로써의 존재인 우주/자연을 아무 생각 없이 볼 때는, ‘산을 보면 그냥 산이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지만,

2) 그것의 본질을 알려고 파고들면 깊은 혼란에 빠져 그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기도 하고, 산은 물이 되기도 하고, 물이 산이 되기도 한다,

3) 이런 미망/혼란의 과정을 거쳐 존재를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상태로 돌아온다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문학의 ‘기승전결’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흔히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이란 ‘기존의 사물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미와 재해석을 불어 넣은 것’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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