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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4. 협주곡과 정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시청 할 때였다. 오케스트라 단원과 독주자는 시종 싸움이라도 하듯 대립과 경쟁을 반복하면서 절묘한 화음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독주자의 카덴차(cadenza) 연주 때, 지휘자와 단원들은 지휘봉과 악기를 내려놓고 숨죽여 바라보고만 있었고, 빠른 보우잉(bowing)때는 활대의 송진 가루가 날리기도 하고, 또 활줄 몇 가닥이 끊어지도 하면서, 신들린(?)듯 연주해 가는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더욱이 이 곡이 브람스가 스승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사모하여 평생을 독신을 지내면서, 애절하게 ‘사랑합니다’를 반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감동은 극에 달했다.

 

여기서 정치도 협주곡처럼 대립과 경쟁 속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정부서 국민 여망을 담아 남북의 평화공존의 길을 닦고 있는 마당에, 일부 야당은 이를 시샘하고 훼방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고 있으니 말이다. 정부의 실정을 유발해 정권 탈환의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화합에는 이미 그 속에 다름이 내재하고 있다(몬드리안)’지 않든가.

민주정치의 갈등과 대립은 어느 면에서는 창의성과 생산성의 왕성한 발로이지 않든가.

 

협주곡/콘체르토(concerto)의 어의도 라틴어의 ‘일치하다, 경합하다’라는 이탈리아어 콘체르타레(concertare)서 유래한 말 아니든가.

따라서 이 말 속에는 대립/대항/경쟁/투쟁의 뜻과 함께 화합/공존/협력/화평의 뜻이 들어있지 않든가.

그래서 협주곡을 반주와 짝을 이룬다는 뜻의 사반악(司伴樂), 경쟁적으로 연주한다는 뜻의 경주곡(競奏曲)이라 부르지 않든가.

물론 옛날에도 관현악과 성악협주곡으로 볼 수 있는 콘체르토 다 키에자(concerto da chiesa)나, 실내협주곡인 콘체르토 다 카메라(concerto da camera) 등이 있었기는 하다.

 

협주곡에는 조화와 감동을 주는 몇 가지 기제도 들어있다지 않든가.

1) 대개 세 개로 된 악장의, 제1악장은 빠른 소나타(sonata) 형식, 제2악장은 느린 리드(lied) 형식, 제3악장은 빠르고 경쾌한 론도(rondo) 형식을 취한다는 점,

2) 1악장의 소나타 형식이, 한시 작법이자 문학의 감동 기제인 기승전결(起承轉結)과 비슷한 ‘제시=>전개=>재현=>종결’의 과정을 취한다는 점,

3) 소나타 형식에 독주악기의 트릴(trill)과 연주 기교를 위해 카덴차를 삽입한다는 점(다른 악장에 있기도 하지만),

4)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치열한 대립과 경쟁, 역동성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점 등으로.(<소리듣기 놀이>/김성환/2008/진리탐구)

 

그러나 협주곡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흔히 ‘톱질’이라고 하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단원간에 주고받는 ‘싸움박질’에 있지 않든가.

단원들과 독주자가 서로 주고받고, 밀고 당기고, 치고받으면서 화음(일치)을 만들어 가는 싸움으로 어느 한쪽의 독무대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든가.

이렇게 보면 교향악의 감동 기제야말로 정치의 기제가 아니겠는가.

 

미국의 젊은 작곡가 그룬버그가 바이올린의 거장 얏샤 하이페츠에게 곡을 주었을 때라고 한다. 곡을 보고 하이페츠가 너무 어렵다고 불평을 하자, 그룬버그가 정색하며 ‘당신이야말로 얏샤 하이페츠 아닙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하이페츠는 불평을 거두고 피나는 연습을 통해 명연주를 했다고 한다.

 

한 교향악단이 거들먹거리는 버릇을 가진 협연자를 초청했을 때 일이라고 한다. 막상 리허설에 들어가자 실력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이에 지휘자와 단원 간에 ‘이놈, 버릇 좀 고치자’는 묵계가 이루어졌다. 이윽고 본 연주에서 바이올린 독주자가 하나둘 셋 세고 다음 프레이즈(phrase)서, 확 보우잉에 들어갔는데 그만 오케스트라가 딴청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자 독주자는 그만 ‘삐로롱’ 하고 틀리고 말았다. 고의든 실수든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협주곡에는 뛰어난 명반이 드물다고 한다.

 

협주곡의 성패는 양측이 당당하게 대립·대항하면서도 긴밀하게 협조해 좋은 음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민 개개인의 각기 다른 욕구를 수렴해 최선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첨예한 대립 사안을 절충/타협하여 합의점을 찾아 냈을 때, 이를 ‘정치예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 Text image/필자의 오카리나 취주 모습/2019. 9. 제주 한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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