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찾아와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화두가 하나 있다. '인생의 의미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고구(考究) 결과는 많다. 그러나 시원스런 답은 없다. 하긴 화두라는 게 원래 상식적이거나나 정상적인 물음이 아니긴 하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고구를 그치지 않는 것은 반성적 사고가 철학의 본령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생의 '본질/의미/목적/가치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이에 대한 답도 제각각이다. 그 중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만도 이런 정도다.
인간/인생의 본질을, 1) 윤리의식(칸트)이다, 2) 이성(그리스 철인들)이다, 3) 사회적 관계의 총체(마르크스)다, 4) 무한히 큰 우주에 비해 인간은 무한히 작은 존재긴 하지만, 그 큰 것을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중간적 존재(半神·半動物적 존재/파스칼)다, 5) 신의 아들(서양종교)이다 라고 한 것들이 있고,
6) 삶을 나비가 된 꿈을 꾸고 난 후, 자신이 나비 꿈속의 한 현상일 수도 있다(장자)라고 생각한 것을 비롯해, 7) 허무(쇼펜하우어), 8) 쓸데없는 고통과 수난(사르트르)이라고 본 것들도 있고,
인생의 목적을, 9) 극락 가는 것(불교), 10) 천당 가는 것(기독교/이슬람교), 11) 윤회의 고리서 벗어나 해탈(힌두교)하는 것이라고 한 것들도 있다.
특히 인간을 '우주나 자연 현상을 초월해 어떤 목적이나 의지에 따라 특수하게 창조된 것'으로 본 견해는 더욱 그렇다.
12) 기독교는 우주를 초월한 영적 존재인 인격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만물이 창조되었고, 인간은 그 만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 했고,
13) 헤겔은 우주의 모든 현상은 가이스트(Geist)라는 정신적 존재가 자의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인간과 역사는 이 우주적 발전의 첨단에 서 있는 존재라 했고,
14) 베르그송은 모든 현상을 영적 존재인 엘랑 비탈(elan vital)이 발전하는 과정의 표상으로 보고, 인간을 이 발전과정의 제일선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들 중 하나를 선택해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기도 한다.
과연 인생의 의미나 목적은 있는 것일까? 인간은 하루하루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언행에는 나름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언행의 총화인 '인생 전체의 의미나 목적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묻는 주체와 답하는 주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행동 목적은 자신이라는 주체를 전제로 하는데, 묻는 주체가 이미 주체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 만물의 한 현상으로 태어났다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죽는 존재다. 따라서 우주적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진/위, 선/악, 미/추, 호/오를 가려가면서 산다. 그러니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자연적 존재’지만, 정신적으로는 ‘의미적 존재’임이 분명한 듯하다. 물론 이 의미도 '인생 전체의 의미'가 아닌 인생에 있어서의 의미 즉 부분적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보다는 가치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는 있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쓴 <캉디드/1759>의 다음 구절은 이런 것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준다.
캉디드가 터키서 만난 수도사에게 물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은 무슨 까닭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괴상한 동물이 만들어졌는지를 묻고 싶어서입니다."
"왜 당신들은 그런 걱정을 합니까? 그런 문제가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이오?"
"하지만 수도사님, 세상에는 끔찍이 악이 많아요."
"악이 있든 선이 있든 무슨 상관이오. 왕께서 이집트에 선박을 보낼 때, 선박 안에 끼어든 생쥐들이 불편할지 아닐지를 왕이 걱정이나 할 것 같소."
어쩌면 지구에 사는 인간의 처지도 위 생쥐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생쥐가 배 안의 곡식알을 요령껏⋅능력껏 취해 생존과 안일을 도모할 수는 있지만, 그 안의 제한적 조건이나 환경은 전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생쥐나 인간 모두 우주나 대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배안의 생쥐처럼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대한 지혜를 발휘해 행복을 도모해 갈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신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가 아닐까?
◘ Text image/김성규 저 <화두>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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