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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정치 공학(?)

 

한 마법사가 도시의 우물에 묘한 약을 넣은 후 말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미쳐버릴 것이다.”

그런데 도시엔 우물이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백성의 것이고 또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온 도시 사람이 미쳐갔다. 그러나 왕만은 정상이었다.

“나에게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우물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신에게 감사해야지.”

온 백성이 미쳐서 춤추고 노래하고 깔깔거리고 울부짖는데도 왕은 즐거운 시간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이 궁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궁전에 근위병이 있긴 했지만, 그들 또한 미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왕 옆에는 몇몇 근위병, 요리사, 하인뿐이었다. 다급해진 왕이 말했다.

“어쩌면 좋은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백성의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그 우물물을 마셨다. 그리고 왕도 미쳐서 춤을 추었다. 그러자 백성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왕의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화를 접할 때마다 혼란이 일어난다. 왕이 백성따라 미치는 게 옳은지, 안 미치는 게 옳은지, 백성과 왕 중 어느 쪽이 정상/비정상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선 ‘정치인은 국민의 잘못된 선택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정치공학(?)도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차원(물질적/육체적/대상적/무의식적 존재)에서 보면,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적/기계적/인과법칙에 따른 존재다. 그러나 의미차원(정신/의미/주체/의식적 존재)에서 보면, 1) 자신이 존재차원임을 인식할 수 있고, 2) 자유의지로 인과법칙도 거스를 수 있고, 3) 시공을 초월한 사고도 할 수 있고, 4) 우주/자연/존재를 의미화 할 수도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처럼 인간은 존재차원과 의미차원이라는 투트랙의 삶을 사는 존재다. 그러다 보니 지구촌은 80억의 사람이 80억 가지 이기심으로 생존을 도모해 가는 각축장이 되기도 한다. 거기다 모든 사람이 언제/어떤 경우든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homeostasis)도 지니고 있다 보니, 인류의 이상인 정의/공정/공평/공익/공생의 기준도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그 결과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범해도 얼마든지 정의로 치부될 수 있다. 그래서였던가? 10여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에서도, ‘이것이 정의다’라고 꼬집어 제시하지 못했다. 정의란 상대적/상황적이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진리/윤리/도덕의 기준도 생존전략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던가.

 

그래서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곧은 나무가 도끼 맞는다’는 경구를 새기면서 생존을 도모해 왔다. 전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전략으로는 도망치는 것(三十六計 走爲上計)을 최상의 계책으로 삼기도 했다.

유대민족도 ‘모든 사람이 앉아 있을 때 혼자 일어서지 말라(탈무드)는 생존 지혜로 숱한 박해를 견디어 오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현인(?)은 ‘조금만 비굴하면 훨씬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밤과 낮, 뜨거움과 차가움처럼 선험적 범주(칸트)*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진위/정오는 분명히 가려진다.

그러나 생존 전략적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정적/불변적/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어 온 진리도, 20세기 전반 현상학과 분석철학이 대두되면서 ‘진리란 인류 공통의 의미체계인 언어를, 올바른 규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반응하고 지각하게 되는 사물에 적용했을 경우’라고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래도 위 일화에 대한 뒷맛은 개운치가 않다.‘왕의 선택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이런 정치적(?) 발언은 우리에게 더 무거운 숙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민들이 미신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들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적절한 태도라 생각한다.”

 

◘ Text image/Rene Magritte(1898~1967/벨기에/초현실주의 화가) 작품

* 先驗的 範疇: 모든 인간의 지성은 누구나 선험적으로 타고난 똑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을 이 형식을 거침으로써 지각의 보편성과 인식이 객관성이 담보 된다는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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