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이란 권력의 감정과 권력에 대한 의지, 그리고 권력 자체를 인간에게 오도록 증대시키는 모든 것이다. 그럼 악/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약함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다. 또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이 더 세진 느낌이고, 싸워 이긴 느낌이며, 어떠한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나약한 인간이나 못난 인간은 세상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인간이란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자들이 망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훌륭한 존재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류애다. 따라서 무익한 인간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일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종교가 바로 크리스트교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다’라고 선언하고, 2,000여 년간 이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서구문화를 쇠망치로 내리 친 철학자 니체의 책 <안티크리스트/1888> 첫 장에 나오는 말이다. 참으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충격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니체는 <도덕의 계보/1881>서 사전 방패막이(?)로 이런 말을 해 놓기도 했다.
“도덕적 가치는 의심할 수 없는 경험적 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인류의 복지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선한 인간은 악한 인간보다 높은 가치를 대표하고 있다. 이를 의심해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만일 선한 사람이 인류의 후퇴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인류의 위험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선/악/행복에 대한 주장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약한 인간은 도태되고 망해야 한다는 것이나 크리스트교 비판은 우리의 상식과 가치관을 뿌리 채 뒤흔든다. 도대체 왜 니체는 그런 황당(?)한 주장과 논리를 편 것일까? 이 또한 빅 퀘스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일단 차치하고, 위 논리와 주장의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 봤다. 왜냐면 이후 유럽 철학운동에 깊은 영감을 줌과 동시에, 마르틴 하이데거, 미셀 푸코,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자크 데리다, 장 폴 사르트르 등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본성을,
1) 아무런 제한이나 장애 없이 자유분방하고 싱싱한 힘을 바탕으로,
2)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자신까지도 완전히 지배하면서,
3) 맘껏 춤추고 노래하고 향락하는 삶을 누리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봤다. 물론 우주의 본성도 그렇게 봤다. 그리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권력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라고 명명했다. 물론 이는 정치/경제/폭력적 차원의 의지라기보다는, 철학/예술/정신/창조적 차원에 힘이 더 실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권력에의 의지>를, '아폴론적(Apollonian) 욕망'에 대비되는 '디오니소스적(Dionysian) 욕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충동적/야수적/본능적 욕구를 제재하는 아폴론적 이성이 아니라, 원초적인 자유분방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1) 생리학자들이 말하는 자기보존 본능, 2) 의학자들이 말하는 생체항상성(homeostasis), 3) 살아있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선과 악의 저편)”등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에의 의지>에 매료/심취/고무/감동/흥분한 니체는, 동물적 힘의 상징이기도 한 귀족적 기사들의 폭력이나 야수성에 빗대 이렇게 찬양(?)하기도 했다.
"우리는 학살/방화/강간/고문 등의 방탕을 마치고 생기에 넘쳐 돌아오는 그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행위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선악의 피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 폭력/착취/파괴적 행위는 내재적으로 불때 전혀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초적으로 생명 자체는 횡포하고 탐욕스럽고 파괴적이다." (도덕의 계보)
그런데 <권력에의 의지>에는 사회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강자와 약자라는 두 부류로 힘의 배분이 생겨난 것이다. 즉 그로인해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피지배자가 생겨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는 소수의 지배자(강자/귀족/영주)와 다수의 피지배자(약자/천민/노예)로 나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니체는 이를 편의상 '귀족과 평민', '영주와 신민'이라 불렀지만, 이는 사회계급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성격이나 인격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즉 '영주 같은 사람'과 '노예 같은 사람'이다.
전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하고 권력에의 의지도 강하며 생명력에 찬 행복한 인간형이며, 후자는 정신적/육체적으로 나약하고 무능하며 비겁하고 위축된 인간형이다. 전자는 선망의 대상인 반면 후자는 기피의 대상이다. 따라서 '선'이란 전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며, '악'이란 후자의 처지를 일컫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어원학적으로도 '선'의 도덕적 가치의 개념은 귀족형 인간의 속성을 이르는 말이었고, '악'의 개념은 평민형 인간이 가진 여러 속성을 이르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가치의 기본 개념은 언제나 계급적 뜻으로서의 계층을 나타내는 ‘귀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덕의 개념은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서 정신의 고귀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선’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런 언어의 변화와 똑같이 병행해서 ‘평범/평민’이라는 개념이 ‘악’이라는 개념으로 개종되었던 것이다(도덕의 계보)."라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권력에의 의지>는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추구하고 실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향유할 수 없다. 결국 극소수의 강하고 건강한 지배층만이 그것을 향유하게 된다. 이로 인해 피지배층에겐 불만이 쌓이면서, 귀족층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고조되고 급기야는 복수를 꾀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약자인 피지배자들은 강자인 지배자와 같이 자유를 바랐지만, 오히려 지배를 받게 된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를 선망하면서 동시에 원한도 갖게 되었다. 이는 곧 지배자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되었고 끝내는 복수심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기독교다. 즉 기독교는 약자/무능한 천민/노예라는 다수의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인 강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꾸며낸 간교한 수단에 불과하다. 결국 기독교는 근원적으로 원한과 증오심에 병든 약자들이 만들어 낸 기묘한 복수의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복수의 방법은 원래의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가치전복(價値顚覆)이었다.
즉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일/성격/행복을 악이라고, 피지배자의 병약/유약/가난/슬픔 등을 선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 Text image/25세 때의 니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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