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이베리아반도서 무어인을 몰아내고 처음 한 일은 공중목욕탕을 폐쇄하는 일이었다(당시 코르도바에만 279채가 있었음). 그들은 다른 사고나 문화를 증오하고 박해했다. 풍요로운 대지와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 반발하고 자신들이 영혼만을 믿었다. 자신들의 고통은 적에게 가함으로써 밖으로 표출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신경증환자로 훌륭한 마음자세, 기력과 자유, 편안한 마음, 상쾌한 기분, 기쁨을 증오했다. 그래서 크리스트교는 패배한 자, 억압당한 자, 하층민에서 생겨나 야만스런 민족에게로 퍼져 나갔다.
반면, 불교는 따뜻한 지역의 관대하고 온화한 사람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상류층과 지식층의 사람들에게서 생겨났다. 따라서 선량하고 온화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가르침이었다. 최고 목표도 밝고 조용하고 욕심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목표 또한 돌진의 대상이 아니라, 평상심으로 지금/여기를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안티크리스트/나체/나경인 역/이너북/2014/66~7쪽).”
기독교인이 보면 기절초풍할 내용이다. 기독교를 거세게 매도/부정/저주(?)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니체는 그런 것일까? 흥미로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니체의 사상을 잘 살펴보면 꼭 그런 저주들만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 주장과 관련된 것들을 일별/一瞥해 봤다. 물론 니체의 사상이 옳으냐/그르냐는 차치하고서다.
대저 사상思想이란 ‘(무엇 무엇)에 대한 일정한 생각이나 견해’일 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약자, 무능한 천민, 노예 등 다수 피지배자들이 소수 지배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꾸며낸 간교한 꾀(수단)'라고 봤다. 그 수단은 종래의 가치를 뒤바꾸는 것이었다. 즉,
1) 권력, 향락, 건강성, 자유분방성이라는 지배층의 특성인 종래의 선을 악으로,
2) 유약성, 우울성, 슬픔이라는 피지배층의 특성인 종래의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배층이 자신들의 일, 성격, 행복을 악으로 느끼게끔 만들고, 피지배층은 자신들의 특성인 병적인 유약성, 가난, 슬픔을 선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의 전복은 의식적으로 드러내놓고 행해지지 않고 은밀하고 교묘한 세뇌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1) 복수의 필요성을 직감하고 공감한,
2)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승려(간교한 지식인)들의,
3) 암묵적 공모와 무의식적 교류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느새 그들 자신도 스스로 전복된 그 가치관을 진리하고 믿게 되었다. 이로써,
1) 피지배자들은 병적이고 가난하고 비굴한 자신들 삶을 선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불행을 위로받았고 심리적 해방감도 맛보게 되었으며,
2)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누려오던 행복을 악이라고 느낌으로써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
2천여 년 간 이어져 온 서구의 윤리적 가치가 이런 바탕서 만들어졌다는 게 니체의 지론이다.
즉 오늘의 윤리/도덕적 가치는 피지배자의 입장서 만들어진 기독교적 병든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들은 ‘약자코스프레니 생명제약’ 등을 선으로 여기게끔 하기 위해서는, 이 가치가 객관적 존재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현세/내세/신'이라는 것이다. 즉 피지배자들의 지배자에 대한 복수가 병들고 약한 자신들의 불만 해소용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든 객관적 진리라고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도들은 병적이고 허구적인 도덕적 규범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피지배자들은 지배자들을 병든 윤리적 가치의 그물 속에 가둘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 전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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