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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전체적/근본적/반성적 사고

흔히들 철학을 전체적(우주적), 근본적(궁극적), 반성적(성찰적) 사고라고 한다.

그래야 우주/자연/존재(사물/사건)의 실체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에 비해 우리의 일상은 부분적(지엽적), 현상적(피상적), 습관적(관행적) 사고의 연속이다.

그래야 일상이 잘 굴러 갈 터이지만, 궁극적 실체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였던가? 일찍이 장자(BC369?~286)는 “어째서 우주현상이 일어나는가(敢問何故)?”라는 우주적 의문을 제기했고,

하이데거(1889~1976)는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 일상의 대부분은 부분적/현상적/관행적 사고의 연속임이다.  그 한 예가 생활의 편의를 위해 수많은 사물과 사건을 구분해 부르는 언어를  '존재 자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 인식했다고 하는 것이  ‘대상을 언어로 무엇 무엇이라고 의미화한 관념’인데도 말이다.

한 예로 우리는 평소  ‘청색/가볍다’라는 언어를 접하면 ‘청색과 가볍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  ‘행복’이라는 언어를 접할 때도, 그 행복을 실제의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금덩이를 찾듯이 ‘행복’을 외부서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생존의 편의와 효율을 위해 언어라는 기호(도구/수단)를 만들어 써 왔다. 그래서,

1) 자연속의 수많은 대상들을 ‘이것과 저것, 하나와 둘, 오늘과 내일, 나무와 돌’ 등으로 구별/범주화하고,

2) 그것들을 낱낱이 쪼개서 언어로 의미화해 사용했다. 그래야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언어화된 개개의 사물/사건들을,

1) 독립된 개별적/실질적 존재라고 여김으로써,

2) 내 재산/내 땅/내 나라/이 인생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고,

3) 이를 지키기 위해 남과 다투고, 남의 나라와 싸우고, 이 인생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존재를 전체적/근본적/반성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나라는 존재는, 1)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해 보면 우주 안의 티끌 같은 존재이고, 2) 억겁億劫*의 시간에 비춰보면 일장춘몽 같은 것임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였던가? 언어라는 기호로 명명되기 이전의 수많은 근원적 존재를, 힌두교서는 브라만으로, 도교서는 도道로, 기독교서는 神신으로, 불교서는 空공이라는 신비적 존재로 칭하기도 했고, 또 플라톤은 이데아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로,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로 칭하면서, 우리들을 전체적, 궁극적, 반성적 사고로 이끌고 가기도 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 부분적/현상적/관행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체적/근본적/반성적 사고를 해야 한다. 하긴 인간이란 존재론적으로 궁극의 실체에 이를 수 없는 존재긴 하지만.

그러나 삶의 보람이 시시포스나 이카로스와 같이 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그런 노력을 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래 얘기들은 궁극으로 들어서는 유용한 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나타나면, 생선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새들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사슴은 급히 달아날 것이다. 그러니 어느 것을 올바른 미美의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냐?”

 

“원숭이들에게 ‘얘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아침엔 도토리 3개(朝三) 저녁엔 4개(暮四)를 주마.’라 하자 모든 원숭이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다시 ‘그럼 아침엔 4개 저녁엔 3개를 주마.’하자 원숭이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장주莊周. 나는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니 어디로 보나 나비다. 나는 내가 나비인줄 알고 기뻐했고 내가 장주인줄 몰랐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나 다시 내가 되었다. 지금 나는 사람으로서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내가 나비로서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다.”(<장자>/김동성 역/을유문화사/1963)

 

그렇다. 1)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가늠조차도 할 수 없는 우주의 기원, 2) 우리들이 목마르게 찾는 고귀한 가치들, 3) 그 가치의 가치들은, 4) 존재를 전체적, 근본적, 반성적으로 조명해 볼 때 조금이나마 드러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통해 궁극적 존재에도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 에는 이런 얘기가 덧붙여져 있다. 1이란, 비둘기가 입에 손수건을 물고 천년에 한 번씩 히말라야 산을 넘어 가는데, 그때 손수건이 산꼭대기의 바위를 스친다. 이렇게 손수건이 스쳐 바위가 다 깎여 나가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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