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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다시 태어난다면(?)

나이 백 살이 된 왕에게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자, 왕은 이렇게 애걸했다.

“저는 아직 삶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온갖 잡다한 나랏일에 파묻혀 육신을 떠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저는 정말 하루도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데려간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제 대신 아들 한 명을 데려가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들이 100명이나 있습니다.”

“좋다. 그럼 네 아들 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100명의 아들 중엔 이미 여든 살이나 먹은 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교활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모두 거절하였다. 그런데 열여섯 살 된 아들은 달랐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음의 사자를 따라가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승사자도 그의 나이를 알고는 측은하게 여겼다. 백 년을 산 아버지도 인생을 여태껏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의 아이가 어떻게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아이를 어떻게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너는 모른다. 너무 순진하다. 아흔아홉 형제 모두가 거절하였다. 그들은 이미 여든이나 일흔다섯 살로 살 만큼 산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네가……?”

“아버지는 백 년을 살고도 삶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하는데, 전들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그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통해 다른 차원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육체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결국, 죽음의 사자는 그를 데려간 대신 왕에게 백 년의 삶을 더 주었다. 그리고 백 년 후 사자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자 왕은 또 놀라고 말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백 년이라는 세월은 길다고 생각하며 별걱정 없이 지냈는데……. 사실은 이번에도 저는 제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막 계획을 세워 살아보려고 했는데 벌써 오시다니 이건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후 이런 일이 아홉 번 더 일어났다. 물론 그때마다 한 명씩 아들을 대신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천 년을 살았을 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말했다.

“지금 생각은 어떤가? 다시 다른 아들을 데려갈까?”

“아닙니다. 삶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언제나 미래와 과거에 가 있음으로써 그것을 놓쳐버렸습니다. 저는 삶을 낭비하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를 데려가십시오.”

왕은 자기 생각을 신하들에게 받아 적게 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기라고 당부했다.

“나는 천 년을 살았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과거와 미래에 가 있음으로써 ‘지금/여기의 삶’을 살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

‘만일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욕심 안 부리고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그렇게는 안 살았을 텐데……’

‘고통 없이 즐거움만 있는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그러면,

첫째,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살 수 있을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의욕(意慾/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욕망)이 없으면 삶의 동력 또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욕망을 자제하여 중용(中庸)을 취해야 할 것이다. 붓다는 사성제(苦/集/滅/道)를 알고, 욕망을 버리면 해탈(대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 일반인들이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둘째, 노년에 알게 된 지혜를 젊은 시절 알고 실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되면 그건 진정한 젊음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젊음이란 미지의 세계 앞에서 불안과 호기심으로 가슴을 설레고, 구름 속 미래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셋째, 괴로움 없이 즐거움만 있는 삶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사물이나 삶은 모두 상대적이다. 골짜기가 있어야 봉우리가 있고, 밤이 있어야 낮이 있고, 배고픔이 있어야 배부름이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즐거움 또한 괴로움의 상대적 개념이다. 산봉우리의 높음은 골짜기의 깊이에서 나오고, 즐거움의 양은 괴로움의 양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가 하늘 끝까지 뻗기 위해서는 뿌리가 땅속 끝까지 뻗어야 하는 것(니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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