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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불교≠종교

한 도둑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용수를 찾아와 말했다.

“스승님, 저도 스승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종 전제가 있습니다. 저는 평생을 도둑질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만은 하지 마십시오. 저도 수십 번 도둑질하지 않으려고 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러니 도둑질에 대해서만은 아무 말도 말아지십시오. 도둑질 외에는 무엇이든 스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걱정 마라. 뭘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네가 도둑이라고 누가 상관이라도 한단 말이냐?”

“그러나 어제까지 이름 난 스승을 많이 찾아가 봤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도둑질부터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스승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도둑을 찾아간 셈이다. 그들이 도둑이 아니라면 왜 너의 도둑질에 그토록 신경을 쓴단 말이냐? 도둑만이 도둑질을 말리는 걸 모르느냐? 나는 절대로 그딴 일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이제야 진정한 스승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이젠 마음 놓고 스승님 제자가 되겠습니다.”

용수는 드디어 도둑이 자신의 트릭에 걸려든 것을 알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너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깨어있는 생각을 가지고 너의 행동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칠 때도 깨어있는 상태에서 너의 행동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삼 주일이 지난 뒤 도둑이 돌아와 말했다.

“스승님은 저를 속이셨습니다. 저는 생각이 깨어 있으면 도둑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참 하다 보면 깨어있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이제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네가 도둑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 내가 그딴 일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 않았느냐? 나는 도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은 너의 손에 달렸다. 네가 깨어있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게 못마땅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스승님, 저는 이제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는 벌써 조금씩이나마 깨어 있는 생각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는 모든 고뇌가 없어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이제 저는 스승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집착을 버리겠습니다. 사실 어젯밤 저는 오랜만에 왕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보물 궤짝을 열었습니다. 그 보물만 있으면 세상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이상 제 사신의 행동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윽고 깨어있는 생각으로 도둑질을 지켜보는 순간, 모든 욕망이 사라지면서 보석이 한낱 돌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서 몇 번이나 생각을 다시 하다가 다시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제 생각이 깨어있을 때에는 그것들을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습니다. 단지 돌일 뿐인데…… 저는 결국 그 보물이 제 욕망의 반영 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교란 ‘1) 초자연적인 절대자(신)의 힘(계시*)에 의존하여, 2)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고, 3)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이고 인식체계’이다. 따라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이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붓다(佛)는 이런 가르침(敎)은 폈기 때문이다. 1) 삶의 고뇌를 구체적/실증적/심리적으로 진단(사정제四聖諦:고苦/집集/멸滅/도道)한 다음, 2) 그에 따른 심리치료법(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正定/정사유正思惟/정정진正 精進)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위 일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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