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왜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지? 학교에 가고, 너의 ‘학교의 아버지’ 앞에 서고, 너의 과제물을 암송하고, 너의 책보를 열고, 너의 점토판에 필기를 하고, 너의 ‘큰 형제’가 새 점토판에 너를 위해 써 주도록 해라. 너의 과제물을 끝내고, 너의 감독관에게 보고 한 뒤 나에게 와라. 그리고 거리에서 방황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을 알아듣겠느냐?”(3,700여 년 전. 슈메르 점토판)
# 2. “얘야, 너는 앞으로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마 정신병자가 될 거 같아요.”
“정신병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저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정치가가 되길 바라고, 아빠는 의사가 되길 바라고, 엄마는 기술자가 되길 바라고, 삼촌은 교수가 되길 바라거든요. 모두가 나를 자기들이 바라는 사람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아무도 정말로 제가 되고 싶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씩 미치고 있어요. 정치가도 조금 되고 의사도 조금 되고 기술자도 조금 되고 교수도 조금 되어 보세요. 정신병자밖에 더 되겠어요?”
“그러면 안 되지. 너같이 똑똑한 아이가 정신병자가 되다니 그건 안 될 말이지. 내가 너희 부모님께 말씀드려 보마.”
“소용없어요. 처음부터 그래 왔는걸요. 제가 말을 배울 때부터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 말했거든요. 이 아이는 아빠를 닮았군요. 코는 엄마를 닮고, 피부는 삼촌을 닮고, 입은 할아버지 닮고…… 그렇다면 저 자신의 것은 무엇이죠? 저는 단지 누구의 것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저를 조금씩 미치게 했어요.”
# 3. 한 면접관이 취업 응시생에게 물었다.
“결혼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결혼이 회사 업무와 무슨 관계라도 있단 말입니까? 저는 입사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자격증을 갖추고 있습니다.”
“진정하시오. 우리 회사는 미혼자는 뽑지 않습니다. 미혼자는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혼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예가 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을 원하지 평등 따위를 외치는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남편들은 집에서부터 잘 길들어 있기 때문에 어떤 반항이나 임금투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말도 되지 않습니다. 좀 더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사회는 자유, 평등 따위를 부르짖는 진보적인 사람을 싫어합니다. 기존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세계에도 동의하지 않는 좌 편향적인 사람도 싫어합니다. 사회구조를 잘 살펴보십시오. 서로 착취/搾取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회는 어렸을 때부터 복종을 가르칩니다. 지금까지 배워 온 것들을 생각해 보시오. 지배와 복종이 아니던가요? 복종이란 당신이 생각하거나 고민할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따르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영국에는서는 모범생(범생이)을 ‘earole’로, 열등생(날라리)을 ‘lads’로 부르기도 한단다. 모범생을 가정/학교/사회서 말 잘 듣고 순종 잘하는 사람으로 보고 이를 경멸적으로 ‘귓구명/earole’이라는 하고, 날라리를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용기 있는 남자로 보고 이를 높여 ‘싸나이/lads’라고 한 것이다(<학교와 계급 재생산>/폴 윌리스/김찬호역/이매진/2004).
밀(1806~1872/벤담 제자/동인도회사원/철학자)도 <자유론/1859>에서 비슷한 논리를 폈다. ‘사회를 발전시키는 이들은 주어진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론을 펴거나 상식을 깨뜨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관습이나 상식에 반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그래서였던가. 날라리들은 공부/실력/성실이 노예 길들이기임을 간파하고 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1) 칠판/책/선생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2) 멍청한(?) 귓구멍 모범생을 경멸하고, 3) 정신노동 아닌 육체노동을 중시하지만, 4) 치밀하게 조직된 사회 체제와 시스템을 넘지 못하고. 5) 노동력 충원 집단으로 복속되고 만다고 한다(폴 윌리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사는 사람은 주인이고 남이 바라는 대로 사는 사람은 노예다. 그래서 주인으로 살아보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사회는 공부 잘하는 사람은 껴안는 대신 공부 못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배척하기 때문이다. 공부란 대부분이 인류가 축적해 온 지적 문화유산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를 더 많이 더 열심히 습득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를 열심 익힌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기준/가치관(잣대)에 잘 순응한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위 일화를 가지고 잠시 생각해 본다. 과연 어느쪽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사실 (0) | 2022.10.13 |
---|---|
불교≠종교 (0) | 2022.08.13 |
다시 태어난다면(?) (0) | 2022.08.10 |
성공만 한 실패는 없다 (0) | 2022.08.07 |
지혜의 터득 (0) | 202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