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이 '직관=>표상=>선험적 종합판단' 거쳐 지식이나 개념이 만들어 지면 그것은 행위의 지침이 된다. 물론 이것이 많은 사람의 공감/공인을 받으면 진리의 반열에 올라서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지식/개념은 ‘의식에 포착된 대상을 언어로 무엇 무엇이라고 의미화 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30여 년 전,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1,000억 여 개의 별이 모이면 하나의 은하계가 되는데, 우주엔 이런 은하계가 또 1,000억 여 개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망원경 성능이 좋아진 지금은 ‘앞 뒤 1,000억이라는 숫자가 1,500~2,000억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평평한 지구가 둥글어진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종교가 과학(지동설)을 불태우는(종교재판) 우도 자주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인식(앎) 여하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 국보 중엔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할 때 이 명칭처멀 빛깔/무늬/모양으로 한다. 즉, 1) 빛깔은 푸른색을 띈 자기(도기가 아님)이고, 2) 무늬는 구름과 학의 무늬를 상감(다른 흙으로 때워 넣음) 했으며, 3) 모양은 매화 꽃 모양의 병이라는 식이다. 그야말로 피상적/현상적/자본주의적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반면 2,500여 년 전, 노자는 그릇으로 쓰이는 도자기를 이렇게 인식했다. 즉 ‘찰흙(埴)을 반죽해서(埏) 그릇을 만들었지만(以爲器), 그릇의 본질은 비어 있다(當其無). 그러나 그릇으로서의 쓰임은 비어 있음에 있다/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도덕경 11장*)’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 인식이다.
현상적/물질적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사람(人)의 행위(爲)로 문화/경제/사회 발전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거나 진정한 안락을 가져다 주진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채움이나 안락이 자연과 하나 되는 삶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人)이 하는 것은(爲) 모두가 거짓(僞)일 수 있다는노자의 가르침은 아주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본질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붓다)’이고, ‘있음(有)의 이로움이란 없음(無)의 쓰임(用)에서 나오는 것(노자)’ 이니 말이다.
* 老子 道德經 11章 :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로 쓸 수가 있다./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되 거기가 비어 있어서 그릇을 쓸 수가 있다./문을 내어 창을 뚫어 방을 만들되 거기가 비어 있어서 방을 쓸 수가 있다./고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쓸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