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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神 3 / 파스칼의 신

 

“신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리는 파스칼(1623∼62)의 말이다. 이는 ‘신의 존재는 이성이 아니라 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는 식 독단론 중 하나다. 아마도 ‘신과 믿음’의 언어적 의미의 혼동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신>은 경험을 초월해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대상에 대한 것으로, 아무런 지식을 전달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언어이고, <믿음>은 지각의 대상을 올바르게 인식한 데서 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과 믿음은 동의어일 수도 없다.

하긴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현상학이나 분석철학(언어철학)에 의해 <언어적 개념이 명료화>되기 이전의 시기로, 뜬구름 잡기 식(?) 형이상학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긴 하다. 

분석철학자들에 의해, <신>과 <믿음>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기 이전 시대였고, 또 <存在한다는 것은 知覺되는 것이다>라는 버클리 식 명제의 새대로, 무어에 의해, <存在/주어>와 <知覺/술어>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 이전 시대였다.

 대저 믿음(믿는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 즉 어떤 대상(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 생기려면, 1) 일단 대상이 있어야 하고, 2) 대상에 대한 감각적 경험이 있어야 하고, 3)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올바른 앎/올바른 지식/진리)이 있어야 하고, 4) 그 인식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보편성과 객관성도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존재차원의 대상이 인류공통의 의미체계인 언어규칙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반응/지각될 수 있게 적용된 상태)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인식은 맑은 의식과 밝은 이성을 떠나서는 생길 수 없다. 1) 경험적으로 실증이 안 되고, 2) 논리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고, 3) 객관성이나 보편성도 없다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신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그러다 보니 이런 고백이 나온 게 아닐까?

# 1. “신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잘못 추정했을 때 닥칠 대가가 훨씬 더 크다. 그러니 신을 믿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옳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고, 비록 내가 틀렸다 해도 아무 변화는 없을 것 아닌가?”

 # 2. “나는 어느 날 밤, 꿈속에서 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환희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자리서 벌떡 일어나 메모를 해 두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그 메모를 읽어보자 참으로 심오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메모를 코트 안자락에 주머니를 만들어 평생 넣고 다녔다. 길을 걸을 때나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등 언제나 그것을 되살리곤 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신학자나 철학자의 머리에서 나온 신은 원치 않는다. 나는 다만 생활 속의 신, 다윗과 아브라함과 야곱의 신을 원한다.’ 나는 그 후 종교나 학문에 등장하는 신, 금식하고 고행하는 이기주의자의 신을 거부했다. 그리고 삶을 선과 악으로 양분하여 선의 편에만 서는 반쪽짜리 신도 거부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신, 야곱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 삶을 사랑하고 즐기는 신을 찾은 것이다.”

 哀哉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는데, 천재 중의 천재라는 그도 우주의 신비 앞에서 잠시 이성을 잃고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로 전락했던 건 아닌지……

 * 화가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 연작 중 에칭 작품의 명.

** 그는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함. 이는 성경의 ‘상한 갈대(마태 12:18∼22/이사야 42:1∼4)에서 유래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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