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카톡 글 하나를 받았다. 내용인즉슨 ‘1) 부/지위/명성을 두루 갖춘 톨스토이가 삶의 허무에 빠졌을 때, 2) 기독교에 귀의해 평온을 누리는 한 농부에 감동을 받고, 3) 그도 농부처럼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 4) 찬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는 요지였다. 덧붙이는 글로 ‘톨스토이처럼 신에 귀의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도 함께였다.
나도 한때 톨스토이의 책들에 심취 해 , 그가 말한 ‘인생의 의미’처럼 살지 못하는 것을 자책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워낙 유명한 소설가의 말이라 그게 곧 진리(?)일 거라 믿었기 때문에 감히 어떤 토도 달지 못했었다. 그러나 뒤늦게 철학 공부를 하면서 톨스토이 같은 유명인의 말에도 논리적 허점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66>에서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도출했다. 주인공 이반은 지방법원 판사로 관계와 사교계를 약삭빠르게 누비는 속물(?)이다. 인생의 목표를 오로지 안락한 삶에 두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은 오로지 그의 삶에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보람된 일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삶의 모든 기준도 상류사회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림으로써 급전직하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누려 온 부, 명예, 성공, 일락이 모두 허무한 것이었음을 알고 깊은 회한에 빠진다. 자신의 삶이 온통 동물적 욕망을 채우는 데에 있었음도 알게 된다. 죽음과 함께 가족과 이별을 생각하자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족의 의미, 동물적 욕망을 넘어선 이타적/윤리적 삶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하인 게라심의 자기희생적 삶에서도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윽고 이반은 죽음 2시간 전,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생전 처음 자신의 손에 키스하는 어린 아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물질적/이기적 욕망을 넘어 기독교적 교리에 따른 정신적/이타적 삶”이 참다운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이것이 인생의 참된 의미일까? 아닐 것이다. 톨스토이가 도출한 ‘인생의 의미’는 철학적 논리적 사고를 통해 연역된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1) 죽음을 합리화(?/미화)해서, 2) 받아들여 보려는 절박한 심정에서 찾은 기독교적 내세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막다른 심리적 상황이 빚어낸 상투적 돌파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의미란 1) 언어적 의미와 2) 사물/사건적 의미 두 가지가 있다. 즉 멸문지화(滅門之禍) 라는 언어적 의미는 유사한 많은 동의어이고, 사물/사건의 의미란 목적에 다름 아니다. 즉 입시의 의미가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인생이 의미’란 과연 무엇이며 또 있기나 한 걸까?
‘인생 - 탄생서 죽음까지의 삶 - 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알고자 하는 사람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자기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자신이 자신을 객관적 대상으로 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즉자/대자론’에 대입해 보면, 대자는 즉자(대상)가 되는 순간, 의식 없는 즉자의 상태에 놓이기 않던가. 그러나 B라는 사람이 A라는 예술가의 일생을 시종 일괄해서 볼 수 있다면, A의 예술적 삶과 완성도에 따라 그 의미를 얼마든지 파악하고 부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인생의 의미 운운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인생에 있어서의 의미’를 혼동한 데서 온 것인 듯하다. 인생에 있어서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무수히 많다. 자신이 욕망하는 모든 것에 의미/목적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의미 있고 행복한 삶도 살 수 있다. 한 예로 트롯에 의미/목적을 둔 사람이라면, 트롯을 열심히 공부하고 들음으로써 즐거움과 행복을 맛보듯이 말이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봐도 인생/인간의 의미나 목적은 없다.
인간은, 1) 40여 억 년 전, 2) 원자 상태의 몇 가지 무기물이, 3) 번개라는 에너지를 받아, 4) 유기물이 되고, 5) 이들이 결합하여 무한 복제가 되는 DNA가 만들어 진 후, 6) 자연선택과 변이라는 억겁의 진화를 거쳐 태어난, 7) DNA의 운반/생존 기계이니 말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그냥 생존=>번식=>사망하는 하나의 생존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뇌는, 1) 무게 1.4킬로그램 내외로 체중의 2% 밖에 안 되지만, 2) 혈액의 25%와 에너지의 20%를 사용하면서, 3) 1,000억 개 세포 속 뉴런이 이룬 네트워크로, 4) 감각을 통해 대상을 머릿속으로 들여와 => 시간적 공간적으로 포맷(표상)한 다음 =>선험적 사고 패턴으로 연결 판단하여 => 유용한 지식으로 만들어(칸트식 존재/인식/관념론) => 생존을 효율적으로 도모하는 초수퍼 초정밀 제어장치다.
이런 뇌는 죽음의 공포도 극복(?) 할 수 있는 영생(신/천국)이라는 문화적 유전자(meme)도 만들어 대대손손 전달(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키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인생의 의미만은 찾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생노병사는 시시포스의 운명과 유사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은 수많은 의미를 만들고 성취함으로써 즐거움과 행복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 따위는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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