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궁극적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이론과 그에 따른 삶의 방향 제시에 다름 아니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종교와 철학의 차이점이 있다면, 초월적 인격신이나 타계인 천국이라는 도그마(dogma)의 신봉 여부 뿐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선택한 종교의 교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종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특정 종교를 따르지는 않으나 궁극적 존재의 근원이나 바람직한 삶의 방향 모색만은 계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초월적인 영적 존재로서의 인격신의 목적에 따라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 만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식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서 말하는, 1) 초자연적 지성을 가진 유일한인격신이, 2) 우주를 창조하고, 3) 기적을 행하고, 4)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고, 5) 죄를 용서⋅처벌하고, 6) 세상의 모든 선과 악에 관여하는 전지/전능/전선한 존재’라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주란 모든 존재의 총칭일 터인데, 이를 초월해서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 밖에 인격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논리가 모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 진위/眞僞를 가릴 수 없는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주문(분석철학)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신이 정말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많이 한다. 기도하면(빌면), 병도 낮게 해 주고, 가난도 벗어나게 해 주고, 전쟁을 이기게도 해 주는 등 온갖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니 말이다. 착한 사람에겐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겐 벌을 준다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을(?/天國)을 준다지 않는가. 하긴 이런 식의 기도가 그릇된 교리 해석에서 나온 미신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말이다.
'BC 4004. 10. 22. 토요일, 오전 6시,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7세기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것은 중학교 과학 수준만 되어도 그것이 허구임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기초한 경전이나 유일 인격신도 실재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감각하고 경험하거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뿐이니 말이다. 어떤 진리든 그것이 진리로써 받아들여지려면 반드시 경험을 통해 증명되고 또 공동체에 의해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오로지 투신적/무조건적인 신앙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다(키르케고르)’고. 그들은 믿음을 일종의 도박이나 투신행위로 본 것이다. 이처럼 객관성/보편성/논리성을 지니지 못한 논리를 펴다 보니, 온갖 무리수가 따랐던게 아닌가 싶다. 즉 이성을 초월한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무리수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데카르트가 ‘존재론적 이론’이라면서,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개념에는 그것이 지시하는 존재가 입증되는데, 전지, 전능, 전선이라는 완전성이다/완전성이라는 개념에는 존재성도 포함된다>라고 한 논리다.
이쯤 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사람의 논리도,
안셀무스의 <하나님은 완전하다(대전제)/완전성은 존재성을 포함한다(소전제)/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결론)>는 것이나,
테루툴리아누스의 <그것(신)이 엉터리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논리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짧은 생애를 온통 기독교 옹호에 바친 천재 중의 천재라는 파스칼(1623∼62)은 <신의 존재는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이나 결단의 문제다. 신의 존재는 직관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실체를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다. 그러니 신이 있다고 믿는 편이 손해가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 의식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신에 대한 통찰이나 조명도 달라졌다. 즉 신이란 인간의 심리적 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환상일 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1) 니체의 <모든 인간은 영주와 노예라는 범주로 나누어지는데, 압박을 받는 불행한 노예들은 영주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려 한다. 종교란 이런 노예들이 영주에게 복수의 수단으로 만들어 낸 간계다>라는 통찰.
2) 프로이트의 <어린아이가 자신을 보호해 주는 아버지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듯이, 죽음의 절망을 의식하는 인간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초월적이고 강한 인격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 신은 이런 필요에 의해 발명된 존재다>라는 통찰,
3) 뒤르켐의 <한 사회가 유지되려면 질서가 필요한데, 이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을 초월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신은 이러한 권위의 의인적 표현이다>라는 통찰들이다.
흔히들 믿음을 ‘초월적 신이나 궁극적 구원과 연결하는 내적 태도나 신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을 ‘논리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약하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신을 믿는 사람이나 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에 대한 논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래의 우수광스런 순환논쟁처럼……
두 사람이 정글을 탐험하다가 한 곳에서 쉬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갖가지 꽃들이 황홀한 자태를 뽐내는 숲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확신논자가 말했다.
"이곳에는 틀림없이 이 정원을 꾸민 정원사가 있을 것이다."
회의론자는 즉각 반격을 가했다.
"천만의 말씀. 여긴 사람의 발자취가 전혀 닿지 않는 곳일세. 그러니 정원사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네. 이런 정글 속을 누가 보러 온다고? 이 정원은 우연히 생긴 것이야."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주장이 너무도 팽팽하여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텐트를 치고 정원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정원사는 나타나질 않았다.
"봐라. 정원사가 없지 않으냐? 이제 증명되었으니 그만 가세."
확신논자가 말했다.
"그 정원사는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왔다 갔더라도 우리가 그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정원에 정원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정원 둘레에 가시철망을 치고 전기를 통하게 하고, 경비견까지 데려다 놓고 밤낮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정원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 충격을 받고 지르는 비명이나 경비견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확신논자가 다시 말했다.
"그 정원사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안 나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경비견이나 전기 따위로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견디다 못한 회의론자가 말했다.
"애초에 자네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은가? 자네가 말하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도 없으며 냄새도 없는 그 신(神)적인 정원사와 단순히 상상적인 존재와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결국,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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