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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 것일까? 예수의 후예들은 이렇게 말한다. "믿으면 천국에 간다. 믿음이 진리이니 말이다." 그러나 천국은 증명된 게 아니고 하나의 약속 아니던가. 살아 있는 동안은 천국을 알 수 없잖은가. 약속이 지켜지는지도 죽어 봐야 알 수 없잖은가. 더보기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 “머리 위의 어떤 사물을 보고 '구름'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의식이 대상과 1차적 관계를 맺은 결과(언어)다. “구름을 보고 구름이라고 의식했다”면 그것은 의식이 대상과 2차적 관계를 맺은 결과(언어)다. 이런 2차적 관계 인 언어(매체)를 흔히들 시어(예술)이라고 한단다. 여기서 詩를 ‘과학이 자연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모든 비밀에 대한 눈부신 해설’’이라고 했던, 앙드레 쉐니에(프랑스/시인/정치언론인/1762~94)의 시 한편을 떠올려 본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게 하지 않기 위해 평온한 얼굴 모습으로 자신이 고뇌를 숨기고 있다 각자 자기만을 측은히 여긴다 자기 권태로움 속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부러워 한다 그가 번민을 숨기듯이 다른 사람.. 더보기
공짜 점심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삶의 효율성/합리성/안락성을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데, 1) 이를 위해서는 협업과 분업이 최선임을 알고, 2) 사회를 합리적 유기체로 만들어 가는데, 3) 이 유기적 조직체가 바로 사회이고 정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의 이념은 인류의 이상이자 최고의 가치인 자유/평등의 실현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17세기 루소에 의해 평등사상이 정치이념으로 제기되기 전까지만 해도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후 칸트에 의해 ‘인간은 개개인이 목적으로 취급되어야지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일반화 된 이후에도 불평등은 여전했다. 특히 자유주의의 꽃이라는 자본주의는 빈부차라는 불평등을 구조화 해 놓기도 했다. .. 더보기
모든 진리는 거짓이다(?) 어리석게도 나이 80에 이르도록 ‘진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르고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가정/학교/사회서 진리의 절대성/엄중성/중요성은 접해 왔으면서도, 정작 ‘어떤 것을 진리라고 하는지’는 모르고 살아왔다. 막연히 ‘참된 도리, 참된 이치나 법칙’ 정도로만 알아왔을 뿐이다. 물론 진리에 대한 외경과 탐구 강박은 받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70대 후반부터 철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공부) ‘햐, 이런 경우를 진리라고 하는구나!’ 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이후 2,000여 년간, 서양에서는 진리를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실존하는 것으로 여긴 나머지 그것을 찾으려고 해 왔다. 즉 우주/자연/존재 등 모든 것을 정확하게 사진 찍듯이 언어로 재현해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착각)하.. 더보기
소외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삶이란 ‘앎에 기반 한 일을 통해 식/의/주를 해결하고, 생존과 번식을 도모하며, 나아가 자아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효율화를 위해 앎/지식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왔다. 아는 만큼 자연을 조정/통제할 수 있고 안락한 삶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앎의 확장 과정에 치명적 독소가 끼어들었다. ‘소외/疏外(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잃고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라는 것이다. 왜일까? 인식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하늘은 푸르다’라고 하는 것(앎/지식)은, 하늘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인간이 인식해 언어로 ‘푸르다’라고 의미화/관념화/개념화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1) 미지의 존재 차원의 대상을 의미 차원의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고, 2) 구체적/사물적 존재를 언.. 더보기
지식과 지혜 "지식은 전달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지혜를 스스로 발견 실천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마음의 평안 행복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거나 가르쳐 줄 수는 없다(헤르만 헤세의 에서)." 지식은 앎인 반면, 지혜는 의미이기 때문이란다. 지식은 논리의 범주인 반면, 지혜는 가치의 범주기 때문이란다. 지식은 인식적 이성의 산물인 반면, 지혜는 관조적 직감의 산물이기 때문이란다. 서양 문명은 대체로 이성에 기댄 반면, 동양 문명은 대체로 직관에 기댔다. 서양은 지식에 치중하여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는 누렸지만 마음의 평온은 누리지 못했다. 동양은 지혜에 치중하여 자연에 순응함으로써 다소 빈곤하긴 했지만 마음의 평온은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취약점은 있다. 동양의 지.. 더보기
무지의 결과 인식론에서는 올바른 인식이나 앎의 조건을 이렇게 들고 있다. 1) 경험적으로 실증될 수 있어야 한다. (경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칸트) 2)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3) 객관성이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4) 정상적인 사람들이나 공동체의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을 살펴 보면 의외로 이런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인식/앎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육도윤회(六道輪廻)가 그렇고 기독교의 천당이 그렇다. 이것을 실제/실재라고 여길 때, 시간/돈/노력/열정이라는 삶의 에너지를 허비하기 마련이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식론 대한 무지와 악의적/의도적인 인식론의 왜곡이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인식/앎의 영향이 개인일 경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지도자.. 더보기
객관과 관객 사람들은 대화 중에 “객관적 입장서 보면 ~ / 객관적으로 말해서 ~”라는 말을 곧잘 쓴다. 과연 인간은 객관의 입장서 사물을 보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식은 인식의 대상(사물/사건)인 객관의 입장이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전이나 철학서에서도 객관客觀object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대상)을 보거나 생각함(사전), 2) 주관에 대립되는 인식 대상(철학), 3)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것(관념론), 4) 주관의 바깥에 있는 독립된 인식 대상(유물론), 5) 객체/대상(존재론)이라고. 인간은 인식 주체인 의식을 떠나 객관의 대상(사물/사건)이 될 수 없다. 대자(의식)는 즉자(대상).. 더보기